맥주에도 정체성이 있다
일본에서는 맥주를 비루라고 한다. 영어 'beer'를 'ビ-ル'라고 적고 '비루'라고 읽는다. 왜 '비루'라고 할까? 일본의 가나문자는 음절문자이고 글자 수가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받침이 없기 때문에 외국어를 적을 때 어려움이 크다.
이를테면 맥도날드햄버거는 '마꾸도나루도함바가'라고 하고 우리나라의 김치 역시 '기무치'라고 하는 정도밖에 그 소리를 표기하지 못한다. 이럴 때 한글의 우수함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된다면 사족일까?
지난 7월 한 달 동안 일본 센다이에서 생활하면서 맥주를 마실 기회가 적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일본에는 일본 맥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사히맥주를 비롯해서 기린맥주, 삿포로맥주, 산토리맥주가 모두 일본 맥주인데 이름만 들어도 일본 것이란 느낌이 팍팍 온다. 아사히는 대부분 'asahi'로 적고 있었지만 본디 '朝日'이고, 삿포로 역시 눈축제로 유명한 홋카이도의 도시 이름이다. 기린은 한국, 중국, 일본 동양 3국 공통이지만 일본의 기린맥주는 역시 일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산토리는 정말 뜻밖이었다. 흔히 'suntory'라고 표기하는 이 산토리는 맥주보다는 위스키로 더 유명한데, 왠지 영어 이름 같았던 이 산토리도 실은 일본말이었던 것이다. 창업자의 별명이 토리(鳥)였고 그 토리 앞에 '씨'라는 뜻의 '산'을 붙여서 산토리가 됐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면 일본 맥주는 그 이름이 모두 일본어이다.
눈을 조금 돌려보면 중국에도 칭다오맥주, 하얼빈맥주 같은 게 있고 우리의 반쪽인 북한에도 대동강맥주, 평양맥주가 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는 우리말 이름을 가진 맥주가 하나도 없을까? 하이트니 카스니 하는 것들은 우리나라 말도 아니고 우리나라 지명도 아니다. 창업자의 별명도 아닐 것이다.
확실히 대한민국에는 우리말 이름 맥주도 없고 우리나라 지명을 딴 맥주도 없다. 오늘도 어디선가 시원하게 맥주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대한민국다운 이름을 가진 맥주 하나 없다는 현실이 좀 섭섭하지 않은가?
- 2008년 08월 16일 (토) 경인일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