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봄, 중국 선양에서 북쪽의 국적기인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고려항공은 주로 중국과 러시아를 오간단다.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나라라 해도 목적지가 베이징이나 선양, 모스크바 같은 곳이라면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비행기는 크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세월 거친 하늘을 난 흔적이 역력했다. 불안함마저 느껴졌지만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비행기 안에서 북쪽 사이다와 빵을 맛볼 수 있었다. 햄버거 빵 사이에 신선한 샐러드가 들어간 샐러드 빵은 맛있었지만 사이다는 톡 쏘는 맛이 없어 싱거웠다. 이거 진짜 사이다 맞아? 그래도 난생 처음 맛보는 북쪽 사이다와 샐러드 빵은 별미였다. 그 이름이 ‘랭천사이다’였던 것 같다. 두음법칙을 적용하면 ‘냉천사이다’가 될 것이다. 아시겠지만 북쪽에는 두음법칙이 없다.
우리 한글맞춤법에는 두음법칙이 있다. 그래서 ㄴ, ㄹ등이 첫음절에 오면 ㅇ혹은 ㄴ으로 글자가 바뀌고 당연히 소리도 바뀐다. 그래서 ‘녀자’는 여자가 되고 ‘래일’은 내일이 된다. 하지만 북쪽에서는 첫음절에 무엇이 오든 그대로 쓴다. 그래서 녀자(여자), 래일(내일)이라고 쓴다. 마찬가지로 리발소(이발소), 로동신문(노동신문), 력사(역사)라고 쓴다. 녀자, 래일, 리발소, 로동신문, 력사라고 발음하기가 조금 어려운 듯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것과 적용하지 않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왜 남북의 국어학자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어문 규정을 만들었을까? 남과 북이 분단되지 않았다면 분명 이런 차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이 되면 어느 쪽이 양보하게 될까? 북쪽이 양보를 한다면 두음법칙을 계속 쓰게 되겠지만 남쪽이 양보한다면 두음법칙은 없어질 것이다.
남북을 가르지 말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라고 한다면 난 두음법칙 폐지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현재 우리 어문규정은 외래어에는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외래어에 대한 특혜일까? 그래서 외래어는 발음이 불편해도(?) 이본, 이모컨이라고 하지 않고 리본, 리모컨이라고 한다. 게다가 오랫동안 문제가 되었던 성씨의 경우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기로 하여 이씨가 리씨가 되고 유씨가 류씨가 되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두음법칙 때문에 성이 오락가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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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안공항은 국제공항이지만 건물은 크지 않고 아담(?)하다. 겉으로 보이는 외관도 화려하지 않고 그저 곱게 빗은 머리에 무명 치마저고리를 걸친 시골 누이처럼 수수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무관세매대’가 있었다. 면세점이다. 면세점이나 무관세매대나 같은 뜻이지만 서로 다른 말을 쓰고 있다.
공항을 나오는 길에 보니 ‘평양 16km’라고 적힌 교통 표지판이 있었는데, 유심히 보니 평양의 교통표지판은 모두 한글로만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곧장 가면 평양역이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왼쪽으로 빠지면 만경대이고, 오른쪽으로 빠져서 왼쪽으로 달려가면 대동교를 건너게 된다. 대동교라면 필시 대동강에 놓인 다리일 것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양각도국제호텔, 평양국제영화회관, 양각도축구경기장이다. 그러니까 여기가 바로 생긴 모습이 양의 뿔을 닮았다는 양각도이다. 대동강 가운데 떠있는 섬이다. 이 표지판은 양각다리에 있다.
교통표지판뿐만 아니라 네거리에는 교통안내원이 수신호로 차량을 유도하고 있다. 글쓴이가 어렸을 때는 서울에도 저와 같은 안내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비가 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얼마 전 햇빛을 가리는 차양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났었다. 햇빛만 가려주는 건 아닐 테고, 비도 막을 수 있으리라. 건물이나 가게 간판도 모두 한글로 돼있다. ‘꽃금붕어’는 아마도 꽃과 금붕어를 파는 가게, 즉 꽃집과 수족관을 겸한 가게일 것이다. 보통문 앞에는 ‘보통문 조선옷점’이 있다. 옷을 파는 가게일 것이다.
고려호텔 안에 있는 ‘평양랭면불고기 식사칸’이다. ‘식사칸’이란 말이 어색하지만 아래를 보면 그릴을 저렇게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글 아래 조그만 글씨로 영어가 적혀 있다. ‘보통강려관’에는 ‘화면반주음악실’이 있다. 단란주점이다. 남쪽에서 가라오케가 단란주점이 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과 진통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평양에서는 아주 쉽사리 화면반주음악실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평양의 교통표지판과 간판은 매우 쉽다. 어딜 가도 알기 쉽게 한글로 적혀 있다. 남쪽처럼 뜻을 알기 어려운 외국어나 외래어 표지로 도배된 미로와 같은 곳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평양에서는 언제 어딜 가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하지만 평양에서 길을 잃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언제 어딜 가도 안내원과 함께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평양랭면식사칸과 화면반주음악실에는 가보았다. 안내원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꽃금붕어’에도 보통문 근처에 있는 ‘보통문 조선옷점’에도 가보지 못했다. 혹시 다시 평양에 가게 된다면 ‘꽃금붕어’와 ‘보통문 조선옷점’은 물론 평양역에도 가보고 싶고 광복거리, 청춘거리 등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싶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맘껏 쏘다니다가 길을 잃어 미아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민족화해 2009/11/12 (통권 제41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