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말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얼마 전 녹색교통문화협회 최유진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말씀인즉 ‘주차 금지’라는 말이 일제잔재어여서 다른 말로 바꾸는 운동을 하는데 지금 생각하고 있는 대체어는 ‘주차금함’과 ‘주차못함’이라면서 의견을 물으셨다. 즉답을 하기가 좀 어려웠지만 일단 ‘주차 금지’라는 말을 일제잔재어로 보기 어렵지 않느냐는 말씀을 드렸다. 의외로 쉽게 수긍을 하시면서 언어적으로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에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배하면서 여러 가지를 ‘금지’했기 때문에 ‘금지’가 들어간 ‘주차 금지’에 거부감을 갖는 분들이 많다고 하셨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요체는 동화였다.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선일체’라는 말을 강조했고, 그 실현의 증거로 일본어의 상용을 목표로 내걸었으며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결코 먼 나라의 얘기가 아니었다. 1940년대 초반 바로 이 땅에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조선어의 마지막 수업이 행해졌다. 그 후 어머니는 ‘오카상’이 되었고 아버지는 ‘오토상’이 되었다. ‘안녕’은 ‘오하요우’, ‘고마워’는 ‘아리가토우’가 되었다. 하마터면 조선어는 죽을 뻔했다.
고맙게도 그런 역사를 망각하지 않았기에 ‘주차 금지’란 말을 쓰지 말자는 주장도 나왔을 것이다. 전화상으로 한참을 얘기한 끝에 ‘주차 금지’란 말이 일제잔재어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말이 너무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라는 데 서로 동의하였다. 생각해 보면 ‘주차 금지’뿐만 아니라 ‘흡연 금지’, ‘노상 방뇨 금지’, ‘고성방가 금지’ 등등의 말들이 다 그렇다. 그리하여 부드럽고 쉬운 말을 쓰는 운동을 하는 데 서로 도울 것을 약속하면서 ‘주차 금지’를 대신할 말로 ‘차못세움’이란 말을 제안해 드렸다.
전화를 끊고 나니 ‘차못세움’만이 아니라 차를 세워도 된다는 뜻의 말도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뭐가 좋을까? ‘차 세워도 됩니다’가 제일 무난하고 좋지만 너무 길다고 시비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차 세우십시오’라고 하면 정중하고 좋지만 그냥 지나가는 차마저 세우라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세울수있음’은 어떨까? 아니 좀 더 짧게 ‘차세워도됨’이 나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말을 쓰자고 하면 굳이 그런 말을 만들어 쓸 필요가 있느냐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차못세움’과 ‘차세워도됨’과 같은 말 덕분에 우리 사회가 좀 더 부드러워질 수 있다면 굳이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사진이 생각난다. 길가에 서있는 전봇대에 ‘주차금지 박살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바로 그 밑에는 흰색 자동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과연 그 자동차는 어떻게 됐을까? 말 그대로 박살나 산산이 부서져 버렸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게 자동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깟 차 좀 세우는 일에 어찌해서 그렇게 살벌한 말을 쓰게 되었을까?
전화번호와 함께 “죄송합니다. 연락 주십시오.”라는 쪽지가 남겨져 있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문제 아닐까? ‘주차 금지 박살냅니다’가 아니라 “급한 볼일이 있는 분들은 차를 세우시고 연락처를 남겨 주십시오.”라고 적힌 쪽지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비록 얼굴을 모르는 남이라 해도 조금씩 배려하고 조금씩 친절을 베푼다면 주차 전쟁이나 주차 지옥 같은 말도 사라질 것이고, 좁은 공간에 차를 세우기 위해 ‘깻잎 주차’의 신기를 연마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이웃 간에 원수가 되는 일도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주차 문제뿐만 아니다. 최근 지하철 패륜남, 패륜녀 역시 말이 화근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차내에서는 좀 조용히 해야지.”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네가 뭔데?”가 아니고 “예.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했습니다.”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이봐 청년, 그렇게 다리를 무릎 위에 얹으면 내 옷에 자네 신발 흙이 묻잖나?”라고 했을 때 “네가 피하면 될 거 아냐?”가 아니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공손하게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 “남의 새끼한테 손대지 말라고 얘기했으면 알았다고 입 다물면 돼.”라며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은 할머니에게 막말을 퍼부은 젊은 엄마의 엽기적인 언동도 너무나 충격적이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대부분 젊은이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느껴지지만 어른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이런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자칫하면 당신 몇 살이냐고 따지면서 ‘민증’을 까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더라도 이제는 어른 대접 좀 해달라며 투덜댈 것이다. 그러니 상대가 좀 젊어 보이거나 어려 보인다고 해서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젊은 것들이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이 타는데도 본체만체해?”가 아니고 “미안하지만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자리 좀 양보해 줄 수 없을까?”라고 예의를 갖춰서 말했다면 “아줌마 다리만 아파요? 내 다리도 아파요.”라는 식의 말대꾸가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제26회 국제농구연맹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가 끝나고 열린 기자 회견에서 중국 기자의 무례하고 저급한 질문에 허재 감독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나도 ‘XX’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입이 걸레라고 해서 반드시 마음마저 걸레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도 깨끗하고 입도 깨끗하면 얼마나 좋을까? 청초한 여학생들의 입에서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육두문자가 와르르 쏟아지는 현실에 대한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아, 제발 욕 좀 하지 말자. 아름다운 말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 이 글은 KAMA저널 10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