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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에는 없는 역사 속 한글 논쟁

봄뫼 2012. 1. 31. 09:36

한글은 탄생한 직후부터 논쟁의 대상이 됐고, 이후에도 수많은 오해와 공방을 낳았다. 가장 큰 논쟁은 "한글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물음에서 비롯됐다. 한편에서는 세종이 직접 창제했다는 친제설(親制說)을 폈고, 다른 편에서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에게 명령해 만들도록 했다는 명제설(命制說)을 주장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며 협찬설(協贊說)로 절충했다.

명제설은 성현(1439~1504)이 <용재총화>에서 처음 언급된다. 성현은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해 신숙주·성삼문 등에게 명해 언문을 만들었다"고 썼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검색해보면 언문청은 1446년 11월에 처음 나온다. 이기문 교수는 "언문청은 아무리 시기를 앞당겨 잡아도 세종 제위 26년 2월 이후 설립됐다"고 말한다. 언문청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야 세워진 것이다.

명제설이 기각되면서 협찬설이 힘을 얻었다. 이기문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거의 모든 저술은 협찬설을 채택한다. 심재기 명예교수는 <한국인의 말과 글>에서 "세종이 집현전에 학자들을 모아 한글 창제의 기초 연구를 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러 가지 정무에 바쁜 임금이 훈민정음 창제에만 오로지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기문 교수는 세종이 한글을 직접 만들었다고 본다. 그는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이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 28자를 친히 만들었다고 기록했다(上親制諺文二十八字).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를 훈민정음이라 하였다"고 전했다. 신숙주는 <동국정운> 서문에 "어제(禦制)하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고"라고 적었다.

왕조시대에는 모든 업적을 임금에게 돌리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한글도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고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 명예교수는 "실록에 기록된 세종의 수많은 업적 중 '친제'라는 단어가 붙은 일은 한글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http://news.jtbc.co.kr/html/167/NB100601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