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시원해야 소통이다
개그는 익살이나 익살맞은 대사를 의미한다. 본디 영어에 있는 말이지만 1970년대에 기존 코미디와 차별을 꾀하던 전유성씨가 발굴해 새롭게 쓰기 시작한 말이다.
전유성, 고영수, 송영길 같은 분들이 1세대 개그맨들인데 어찌나 성공적이었는지 그 후로는 모두 ‘개그맨’으로 통용되고 있다. 프로그램 제목도 개그콘서트, 개그야, 개그시대, 개그투나잇 등등 개그가 대세를 이룬 지 오래다.
개그투나잇이란 프로그램에는 ‘한 사장’이라는 꼭지가 있다. 한사장이 주인공일 것 같지만 주인공의 이름이 아니다. 한 사장은 돈을 빌려간 사람이고 한 사장에게 10년 전에 빌려준 돈 7천9백70원을 돌려받으려고 매번 무대에 등장하는 이가 주인공이다.
“한 사장. 오랜만이야. 10년 만인가? 하나도 안 변했구먼. 정말 반가워. 나 기억하지? 10년 전에 내 돈 7천9백70원 빌려갔잖아. 기억하고 있겠지? 아무렴 한 사장이 그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잖아. 자, 그럼 이제 내 돈 7천9백70원 돌려줘야지. 응, 한 사장!”
문제는 돈을 빌려간 한 사장에게 주인공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손사래를 쳐도 한 사장은 본체만체한다.
“한 사장, 나라니까. 물론 바쁘겠지만 내 돈 7천9백70원은 돌려줘야지. 벌써 10년이나 됐는데, 이제는 갚아야 하지 않겠어? 자, 한 사장, 내 돈 7천9백70원 갚아.”
아무리 빌려준 돈 7천9백70원을 돌려달라고 목청을 돋워도 한 사장에게는 우이독경이고 마이동풍이다. 뿐만 아니라 한 사장의 부하 직원들로 나오는 젊은 두 남자에게도 주인공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주인공은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다.“내 목소리가 안 들리나? 한 사장, 정말 안 들리는 거야? 아니 내가 안 보이느냐고? 한 사장, 내 돈 7천9백70원 돌려 달라니까. 이거 뭐가 이렇게 소통이 안돼?”
결국 주인공은 뭐가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느냐며 분통을 터트리지만 한 사장은 끝날 때까지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 한다. 한 사장은 바쁘다. 자신의 일이 바쁘고, 부하 직원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느라 바쁘다. 너무 바빠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들을 겨를도 없고 주인공을 쳐다볼 여유도 없다. 그래서 주인공과 한 사장은 끝내 소통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주인공의 목소리를 잘 듣고 보면서 이 상황을 즐긴다. 한 사장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시청자에게는 잘 들린다.
이게 이 콩트의 전략이다. 출연자들 간의 불통을 수단으로 시청자와 소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한 사장이 주인공의 등장을 의식하고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면 어찌 될까? 한 사장은 10년 전에 빌린 돈 7천9백70원을 돌려줄 테고, 돈을 돌려받은 주인공이 고맙다며 무대를 떠나면 콩트는 아주 싱겁게 끝나버릴 것이다. 그래서 한 사장의 ‘불통’은 즐겁고 유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콩트가 불통을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장’의 유쾌한 불통은 시원스런 소통에 대한 갈망이다.
이 글은 위클리 공감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