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 청춘의 행진곡
1989년 늦여름이었다. 가을 개편을 앞두고 청춘만만세가 없어질 거라는 비보와 함께 새 프로그램이 생긴다는 낭보가 돌았다. 과연 어떤 프로그램일까?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던 어느 날, 새 프로그램을 맡은 지석원 피디가 나를 불렀다.
“이번에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엠시를 좀 맡아줘야겠어.”
“네? 제가 엠시를요?”
그렇게 해서 난 청춘행진곡의 엠시가 되었다. ‘내가 엠시가 되었다.’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엠시면 프로그램 시작하자마자 인사를 하고 중간에 다음 순서 소개를 하고 끝날 때 또 작별 인사를 하고 뭐 실제 하는 건 그런 정도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엠시는 프로그램의 얼굴이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아무도 알아봐 주는 이 없는 무명 개그맨이었는데 문화방송의 두 개밖에 없는 코미디 프로그램 중 하나의 얼굴이 되는 거다.
다음 날부터 제작 회의를 했다. 무대에는 상큼하게 혼자 올라간다. 중간에는 전도협에서 하던 개그를 변형해서 청춘들의 고민해결사라는 설정으로 간다. 끝날 때도 혼자 올라가서 상큼하게 끝낸다. 매주 세 개의 꼭지를 도맡아 해결해야 한다. 자, 첫 주가 제일 중요하다. 첫 주에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당시 절친했던 경규에게 물었다.
“지난 번에 대학 그룹 콘서트 사회를 봤는데 사람들이 나를 모르잖아 그래서 시작 전에 일단 나가서 오늘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운을 떼고는 잠시 후에 공연이 시작되면 정말 멋진 사회자가 진행을 할 거니까 기대하시라고 한 거지. 그러고는 공연이 시작되고 다시 나가서 오늘 진행을 맡은 정재환이라고 시침 뚝 떼고 인사를 했는데 사람들이 무지하게 웃는 거야. 이거 방송에서도 먹힐까?”
“그거 하면 되겠네!”
두뇌 회전이 빠른 경규는 정말 훌륭한 조언자였다. 첫 녹화가 시작되고 무대에 올라갔다. 사회자를 소개하려고 나왔다는 말을 하려니까 다리도 덜 후들거렸다. 일단 내려왔다가 다시 무대로 올라가서 정색을 하고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방금 소개 받은 정재환입니다.”
순간 ‘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대성공이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내 청춘의 빛나는 행진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전에 준비한 대로 청춘들의 고민도 해결해 줬다.
“결혼 못해 고민하는 여성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여성도 자기 의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릴 겁니까?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길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다. 그럼 따라가는 겁니다. 끝까지 따라가서 남자가 집으로 들어가면 일단 그 집에다가 공을 던져 넣는 겁니다. 그런 다음 들어가서 들키면 공 주우러 왔다고 하고 안 들키면 눌러 사는 겁니다.”
객석에서 터지는 여학생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고민과 고뇌로 보낸 기나긴 시간에 대한 값진 보상이었다. 끝인사를 하고 났을 때에는 생각지 못했던 음악이 배경 음악으로 깔렸다. 그냥 서있기가 민망해서 나도 모르게 몸을 흔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민망한 어설픈 몸짓이었는데 그게 또 터질 줄 누가 알았을까? 나중에 임하룡 선배가 “그 헐렝이춤은 어떻게 추는 거야?”라고 해서 헐렝이춤이라는 이름도 붙여졌지만, 정말 춤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춤으로 대미를 장식했고 나는 떴다. 지금도 가끔 “그 때 그 춤추신 분이죠?”라는 인사를 들을 정도니......
50분짜리 프로그램이어서 여러 가지 꼭지가 있었다. 다는 기억나지 않지만 김병조의 짱구네 집, 서세원의 청춘데이트, 최병서의 병팔이의 일기, 박미선의 청춘교실, 좌우로 정렬 같은 콩트들이 모두 성공했다. 각각의 콩트들이 선전한 덕분에 덩달아 돋보일 수 있었고 뜰 수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난 눈부신 조명 아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까지는 아니었지만 정말 졸지에 유명한 개그맨이 돼가고 있었다. 불과 몇 주 후에는 무대에 올라가기만 해도 환호와 웃음이 터졌다. 여기저기 방송에서 섭외 전화가 왔고 행사장에서도 섭외 전화가 왔다. 과자 광고에도 출연했고, ‘깊은 밤 짧은 얘기’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도 되었다. 당시 ‘수탉’이란 영화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한 영화배우 최유라가 공동 진행자가 되었다. 강산이 두어 번 바뀌고 라디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아줌마 디제이가 되었지만 20살 최유라는 예뻤다.
깊은 밤 짧은 얘기에 ‘익살이’라는 꼭지가 있었다. 그날 도착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그 중 으뜸으로 재미있는 얘기를 보내주신 분을 ‘익살이’로 선정했다. ‘익살이’라는 이름은 ‘익살’에서 따온 것이다. 남을 웃기려고 일부러 하는 우스운 말이나 짓이 익살이므로 남을 웃기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내주신 분들을 익살이라고 한 것이다. 날마다 웃기는 이야기들이 전국에서 쇄도했다. 항간에 떠도는 제법 유명한 우스갯소리들도 많았지만 개그맨과 영화배우가 최선을 다해 소개하니 조금은 더 재미있었는지 방송을 시작하고 3개월 만에 깊은 밤 짧은 얘기는 인기 순위 10위 안에 드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얘기였나 궁금해 하실지 모르니 익살 하나 풀고 넘어간다.
“‘아’ 발음을 못하는 군인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암구호가 ‘고구마’였다. 한밤중에 이 군인이 보초를 서려고 초소에 다가가자 초병들이 암구호를 물었고, ‘아’ 발음을 못하는 이 군인은 ‘고구미’라고 대답했다. 암구호가 틀리자 초병은 가차 없이 총을 쏘았고 가슴에 총을 맞은 군인이 쓰러지며 말했다. ‘윽, 김진기?’”
그 때만 해도 라디오에서 팝송을 많이 틀었다. 존 덴버, 이글스, 비지스 등등 미국의 팝을 주로 소개했다. 가끔 노래 제목이 어려우면 영한사전을 참고하기도 했다. 영한사전이 필요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여러 프로그램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스튜디오에는 반드시 영한사전이 비치돼 있었고, 그 사전을 들춰보면서 되도록 발음을 틀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국어사전이 비치된 스튜디오는 없었지만 그다지 불편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왜였을까? 국어를 잘해서 국어사전을 볼 필요가 없었던 거였을까?
일 때문에 제 때 끼니를 때우지 못하기도 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김밥으로 때우기고 했다. 어떤 날은 링거를 꽂고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했으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었고, 어딜 가나 환영을 받았다. 그것은 연예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었다. 돌이켜 보면 청춘행진곡과 깊은 밤 짧은 얘기는 내 청춘의 행진곡이었고, 햇살처럼 반짝이는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20대와 작별하면서 서른 문턱을 넘어섰다.
1991년 12월 9일 서울방송이 개국했다. 작가로 전향해 눈부신 활약을 거듭하고 있던 도시상영 시절의 짝꿍 유성찬이 나를 불렀다. 윤인섭, 주병대 등 실력이 좋은 연출자들이 코미디를 맡으니 함께 하자는 거였다. 주저하고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둘도 없는 친구의 요청이었다. 뭔가 변해야 한다는 나 자신의 욕구도 적지 않았기에 결국 서울방송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최양락, 김학래, 임미숙, 이봉원 등이 왔고, 문화방송에서 서세원, 박미선 그리고 나까지 3사람이 서울방송에 새 둥지를 틀었다.
- 이 글은 민족21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