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로운 출발!
서울방송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 깊은 밤 짧은 얘기였다. 깊은 밤 짧은 얘기는 정말 잘 나가고 있었다. 날마다 엽서가 쇄도하고 있었고, 청취율도 계속 상승 중이었다. 당연히 문화방송 라디오 측에서는 계속 진행해 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뭔가 좀 불편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여의도 문화방송 사옥에는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깊은 밤 짧은 얘기를 계속한다면 텔레비전 사람들하고 입구나 복도 같은 곳에서 계속 얼굴을 마주쳐야 한다. 마주치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왠지 불편했다.
지금이야 어느 한 방송사에 소속된 연기자라는 인식이 엷어서 그렇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누구는 엠비시 연기자, 누구는 케이비에스 연기자 하던 시절이었기에 양다리를 걸치는 게 어색하고 맘에 걸렸던 것 같다. ‘그래 옮기려면 깨끗하게 다 옮긴다!’ 게다가 원체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품 탓도 있어 몽땅 정리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난 전국 방송에서 사라졌고, 지방에 있는 펜들에게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는 하소연을 들어야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달 정도 휴식을 취하고 서울방송 개국과 함께 현장에 복귀했다. 안국동에 있는 운현궁 스튜디오에서 코미디 전망대 녹화를 했다. 1980년 말에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동양방송이 없어질 때까지 사용하던 코딱지만 한 스튜디오가 10여 년 만에 서울방송 녹화장으로 부활했다. 스튜디오가 작아서 한 꼭지를 뜨면 세트를 뜯고 다시 다음 녹화할 세트를 세우고 녹화를 해야 했다. 연기자들은 세트가 다 설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별다른 불평 없이 상황을 감내하고 있었다.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대기실도 역시 코딱지만 했다. 좁은 공간에 간신히 의자를 들여 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본을 읽으며 연습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분장을 했다. 들락거릴 때마다 어깨를 스치고 땀 냄새, 입 냄새를 맡아가며 일을 했으니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양쪽 방송사에서 온 연기자들이 친해지기에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다.
“지금 나 친 거야?”
“치긴 누가 쳐? 민 거지.”
“그런가? 하하하.”
대기실에는 옷뿐만이 아니라 안경, 수염, 모자 등등 온갖 소품이 다 뒤죽박죽 엉켜 있었기 때문에 “내 수염 봤어?” “코 밑에 붙인 건 뭐야?” 자연스레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먹한 감정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코미디 전망대 모의국회는 국정 현안을 놓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격돌하는 국회 소위원회 모습을 풍자한 것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발군의 시사풍자 코미디였다. 한 번은 간통죄 폐지안을 놓고 기상천외한 공방이 펼쳐졌고, 야당 의원으로 분한 최양락 씨가 여당 의원들을 상대로 일갈했다.
“기혼 남성 5인 중 1인이 간통의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한번 세어 봅시다. 이봉원, 김종국, 김은우, 구수한, 그리고 위원장(정재환). 그렇다면 이 다섯 사람 중에 도대체 누구요? 이봉원 당신이야, 아니면 위원장이야?”
“이거 보세요, 거기 왜 나를 집어넣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이 위원장 체면이 뭐가 됩니까? 다시 한 번 세어 봅시다. 이봉원, 김종국, 김은우, 구수한 그리고 서기.”
“위원장님, 저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요.”
“가면 되잖아.”
장가도 가지 않은 서기를 장가가면 된다면서 저만 빠져나가려는 위원장의 모습에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저만 살겠다고 빠져나가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최양락 의원의 공격에 대한 이봉원 의원의 변명도 한 마디 언급해 보자.
“이봐, 최 의원, 당신은 남이 하면 간통,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도 못 들어 봤어? 난 어디까지나 로맨스야.”
멍청하면 어떤가? 때로는 좀 이봉원 의원처럼 솔직하면 안 될까?
문화방송에서 청춘행진곡이란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었지만 정작 진행자가 된 것은 서울방송에서였다. 왜냐하면 청춘행진곡 진행이라는 것은 실은 진행이 아니고 혼자서 하는 1인 개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통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것은 서울방송의 ‘지구촌 퀴즈’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지구촌 퀴즈는 지구촌 시대의 개막과 함께 지구촌 곳곳의 풍물을 소개하면서 어떤 것의 가격 혹은 사용료 등을 묻는 프로그램이었다.
1991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힌 이영현이 공동진행자가 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나는 진행이 처음, 이영현은 방송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초보 운전자들이 겁도 없이 시내버스를 몬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매주 열심히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영현은 무서운 속도로 방송에 적응했고 진행자로서 배짱도 있었다. 하지만 신인이어서 실수도 없지는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영현이 출연자들에게 뭔가 제안을 하면서 따라 달라고 요구를 했다. 한 출연자가 “왜 그래야 합니까?”라고 되묻자, 이영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야 오야 맘이죠.”였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오야’가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말이라고 해도 방송에서는 피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본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대 손님도 아니고 진행자가 녹화 중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오야’를 발설했다.
‘오야’는 일본말 ‘오야지’의 줄임말이거나 그 자체로 아버지, 혹은 사장 등을 뜻하는 말이다. 계주를 ‘오야’라고도 한다. 돈을 맡고 관장하기 때문이다. 두목이라는 말로도 통용된다. 그래서 애들끼리 패를 갈라서 놀 때 ‘오야’를 뽑기도 한다. 이렇게 오야는 두루 쓰이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 때는 ‘오야’ 없이 살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야’는 일본말이므로 방송에서는 쓸 수 없었다.
그래도 지구촌 퀴즈하면 ‘얼마예요?’라는 말이 떠오른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함께 보시죠. 큐!”라든가 “브이티알 스타트”라는 말을 남발하던 시절에 그래도 지구촌 퀴즈에서는 ‘하우 머치?’란 말을 쓰지 않았다. 그냥 우리말로 ‘얼마예요?’라고 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른다. ‘하우 머치’란 말이 너무 영어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우연히 우리말 ‘얼마예요?’를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큐’나 ‘스타트’보다는 살가운 우리말이었다.
이영현은 어찌 살고 있을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구촌 퀴즈가 종영하고, 이영현은 한국방송공사에서 토요일 저녁 쇼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그러다가 문화방송에서 임성훈 선배와 함께 사랑의 스튜디오를 진행했다. 진행자로서는 그 때가 아마 이영현의 전성기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시집을 갔나? 언젠가 석사학위를 받았다면서 전해 준 논문이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다. 그런데 그 후 어찌 사는지, 공부를 계속 했는지 아니면 공부나 바깥일을 접고 그저 현모양처로만 사는지 궁금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해서 무섭게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을 때 ‘쇼서울서울’이란 프로그램이 신설됐고, 나는 뮤지컬 스타 남경주, 젊은 춤꾼 박형진과 함께 엠시파워란 이름으로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춤은 정말 못 췄지만 날마다 무용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그래도 춤 실력이 늘지 않는다. 하느님이 이런저런 재주를 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지만 두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랩도 했다.
“토토 토요일 밤에 밤에 엠시파워와 함께 하는 쇼쇼쇼우 서울서울!”
- 이 글은 민족21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