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연음법칙을 모르는 무식한 진행자
지난 호에 실린 글을 읽으시고 개그맨 표인봉과 표영호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혹시 ‘펴’라고는 하지 않는지 관찰하신 독자가 한 분이라도 있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허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비단 두 개그맨뿐만 아니라 성이 표씨라면 입을 되도록 오므려서 ‘표’라고 정확히 발음해 주셔야 하고, ‘표’가 끝에 오는 ‘버스표’, ‘이름표’, ‘차림표’ 등도 입을 작게 오므리셔야 한다.
이름에 관한 발음이라면 글쓴이의 성도 간혹 문제가 된다. 글쓴이는 성이 ‘정’이다. 정가라서 가끔 ‘증~재환’ 하고 부르는 분들이 있다. 서울이나 경기도가 고향이신 분들이 간혹 이렇게 발음을 하는데, ‘정’을 장음으로 길게 발음하면서 ‘증~’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서울경기에서는 예로부터 ‘정말’을 ‘증~말’로, ‘전화’를 ‘즌~화’로 발음했다. 그래서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증~몽주’라고 발음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ㅓ’가 장음인 경우 ‘ㅡ’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이 표준발음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울경기 사투리이므로 그냥 ‘ㅓ~’라고 발음하는 것이 표준발음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쟁도 꽤나 역사가 깊은데 그럼에도 아직까지 결판이 나지 않은 것은 말 문제가 쉽지 않다는 증거 중 하나라 생각한다. 여하간 글쓴이의 성은 정몽주와 같은 정(鄭)이 아니고 정약용과 같은 정(丁)이어서 그냥 짧게 ‘정’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맞다.
늦게 철든다는 말이 있다. 철은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그러므로 늦게 철든다는 말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늦다는 의미다. 글쓴이는 우리말에 관한 한 늦게 철든 경우다. 게다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고 철들도록 자극을 준 분이 두 분이나 계시다. 한 분은 지난 호에 소개한 여학생 ‘표아무개’ 님이고, 또 한 분은 일면식도 없는 어느 시청자셨다.
1995년에 케이블방송이 개국을 했다. 한국방송공사 두 개, 문화방송, 서울방송, 교육방송까지 해서 달랑 채널이 달랑 5개였는데 하루아침에 수십 개의 채널이 더해졌다. 물론 작년에 문을 연 종합편성채널처럼 종합선물세트 같은 방송은 아니었지만 스포츠, 음악, 뉴스, 여행, 패션, 여성 등등 각각 전문성을 지닌 채널들이 방송을 시작했다. 글쓴이는 음악채널인 케이엠 티브이에서 생방송 프로그램을 맡아 브이제이로 일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음악 소개하는 이들을 디제이라고 하는 것처럼 텔레비전 방송에서 음악 소개하는 이들을 브이제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비디오자키를 줄인 말일 것이다.
매일 저녁 8시부터 1시간 동안 시청자들의 신청곡을 뮤직비디오로 전달하는 프로그램이었고, 제목은 ‘정재환의 뮤직캠프’였다. 이 제목 때문에 배철수 선배한테 핀잔도 들었다. 자기가 진행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랑 제목이 너무 비슷하다는 거였다. 글쓴이가 제목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지청구를 들어야 했던 것은 글쓴이였다. 돌이켜 보면 ‘캠프’가 들어간 게 비슷했다. 나중 일이지만 캠프 대신 텐트를 넣으면 어떨까 하는 의견도 있었다. ‘정재환의 뮤직텐트’ 아니다. 방송에서 외래어를 너무 남용하면 안 되니까 텐트 대신 천막을 넣어서 ‘정재환의 음악천막’ 정도면 어땠을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지만 당시 솔리드가 ‘이 밤의 끝을 잡고’란 노래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뭔가 하나 터지면 예나 지금이나 사방에서 난리다. 신청합니다. 솔리드 이 밤의 끝을 잡고, 듣고 싶어요, 이 밤의 끝을 잡고, 오늘 꼭 들려 주셔야 해요, 이 밤의 끝을 잡고, 정말 잡고 싶어요, 이 밤을, 정재환 씨도 같이 잡아요, 이 밤의 끝을 잡고…….
그래서 거의 날마다 솔리드의 노래를 소개했던 것 같은데 하루는 방송이 끝나자 피디가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저 조금 아까 어떤 시청자가 전화를 했는데요, 말씀드려도 될까요?”
“무슨 얘긴데요?”
“글쎄요, 그게…….”
“아, 주저하지 말고 그냥 있는 대로 얘기하세요.”
“그럼,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시청자가 뭐라고 했냐 하면요, 진행자가 무식하게 연음법칙도 모르면서 무슨 진행을 하냐? ‘이 밤의 끄츨 잡고’가 아니고 ‘이 밤의 끄틀 잡고’다.”
그 순간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망치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진행자가 무식하게 연음법칙도 모르면서?’ 이거 정말 무식한 거 아닌가? 연음법칙!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그 연음법칙을 왜 까맣게 잊고 살아온 거지? 정말 얼굴이 화끈거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연음법칙 이거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잖아. 어려운 거 아닌데 왜 그것도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살아온 거지?’
정말 반성을 많이 했다. 그런데 이게 반성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말이란 습관이어서 오랫동안 입에 밴 습관을 고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날 이후 난 맹연습에 몰입했다. 신청곡을 틀 때마다 마이크를 올리기 전에 반드시 연습했다. ‘솔리드입니다. 이 밤의 끄틀 끄틀 끄틀 잡고!’ 그렇게 충분히 연습을 한 다음, 카메라 앞에 섰다.
‘솔리드입니다. 이 밤의 끄틀 잡고.’
맹연습과 긴장 덕분에 ‘끄틀’은 해결할 수 있었지만 ‘끄틀’만 문제가 아니었다. ‘꼬치’ 예쁘다고 해야 하지만, ‘꼬시’ 예쁘다고 하고, 친구한테 ‘비즐’졌다고 해야 하는데, ‘비슬’졌다고 한다. ‘비슬’ 진 거라면 ‘빗’으로 갚으면 되겠지만, 그런다고 친구가 ‘비즐’ 탕감해 줄 리 만무하다. 당신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신파극 대사가 유행한 적도 있었지만, ‘앙꼬’가 일본말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앙꼬 없는 찐빵’이란 표현은 모습을 감췄지만, 찐빵에 들어간 게 뭐냐고 물으면 ‘파시’라고 답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게 현실이다. ‘파시’ 아니고 ‘파치’라고 해도 그 ‘파테’ 거부감을 갖는 게 오히려 당연할 지경이다. 하지만 찐빵에 들어가는 게 ‘파치’라는 걸, ‘파틀’ 넣어야 찐빵이 맛있다는 걸 맛만이 아니라 정확한 발음으로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탤런트 채시라 씨가 아기의 건강을 위해 모유 수유를 한다는 뉴스가 나왔었다. 몸매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탤런트가 모유 수유를 한다는 게 뉴스거리가 되었던 게다. 그 뉴스를 접한 젊은 엄마들 가운데 ‘나도 나도’ 하면서 용감하게 모유 수유를 결심한 이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아, 자식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과도 같고 하해와도 같은 것이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그런데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다 보면 걱정거리가 생긴다. 분유는 언제든지 타서 먹일 수 있지만 모유는 사람에 따라 나오는 양이 달라 젖 줄 시간에 제 때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엄마들은 ‘저시’ 나오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하소연을 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라. 나오지 않는 것은 ‘저시’ 아니고 ‘저지’다. ‘저슨’ 새우젓이라든가 멸치젓, 명란젓 같은 게 ‘저시’다. 만일 그런 게 나오면 아기의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저시’ 나오지 않는다고 걱정할 일인가? 나오지 않는 것은 ‘저시’ 아니고 ‘저지’다.
연음법칙은 앞 음절의 받침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형식 형태소가 이어지면, 앞의 받침이 뒤 음절의 첫소리로 발음되는 음운 법칙으로 ‘하늘이’가 ‘하느리’로 소리 나는 것 따위이다. 우리말의 사용자로서 이 정도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부끄럽고 한심한 일일 것이다. 늦게 철든 글쓴이가 이런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글쓴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끝으로 1995년에 전화를 걸어주시고 커다란 가르침을 주신 이름 모를 어느 시청자에게 이 지면을 빌려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 이글은 민족21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