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올 가을에는 한번 떠나보자, 영릉으로!
2003년 어느 날 충동적으로 영릉을 찾았다. 초등학교 소풍 길에서 숱하게 보았던 조선 왕들의 묘와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세종의 무덤이었지만 그 날은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그것은 후손들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남기신 위대한 선조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그 날 난 결심했다. 앞으로는 1년에 두 번 아니 한 번이라도 꼭 영릉을 찾자. 와서 영릉이 잘 있는지 보고, 인사도 드리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한글운동을 하는 모습도 보여드리자.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뻗친 것이 바로 한글문화기행이었다.
돌아오는 즉시 회원들과 함께 답사를 떠날 것을 준비하였다. 서둘러 안내문을 띄우고 일정을 짰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신륵사를 보고 여주 쌀밥으로 점심을 먹고 영릉을 참배하는 코스였다. 1인당 회비는 20,000원으로 정하였다.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관광버스도 빌렸다. 이렇게 해서 제1회 한글문화기행이 성사되었다.
2003년 10월 26일 일요일 아침 일찍 회원들과 함께 서울을 떠났다. 영릉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을 보이는 분도 있었지만, 임금님이 드셨다는 여주쌀밥에 더 큰 기대를 거는 분도 꽤 있었던 것 같고(?), 더러는 휴일을 맞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심정으로 나온 분도 있었던 것 같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신륵사였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한 절로 세종과의 인연은 원래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에 있던 능을 1469년(예종 원년)에 여주로 옮기면서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을 모시는 사찰이 되면서였다.
영릉은 박정희 대통령 때 대대적으로 성역 정비 사업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당 오른편에 세종 동상이 모셔져 있고, 왼편에는 세종 대에 만들어진 여러 가지 과학기기들이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자료관인 세종전도 있어 한글뿐만 아니라 참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라는 걸 한 눈에 실감할 수 있었다.
한글로 이름을 쓴 훈민문을 지나면 묘역이 시작된다. 홍살문을 지나 신도와 어도를 밟아 정자각에 이르러 향을 피우고 다 같이 묵념을 했다. 고개를 숙이고 다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제례 음식을 차렸다는 수라간이며 청소 도구 등을 보관하던 수복방도 기웃거리고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영릉에 올랐다. 봉분까지는 개방돼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주 가까이서 영릉을 볼 수 있었다. 능은 세종과 소헌왕후를 함께 모신 합장릉이어서 혼유석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문인석과 무인석이 고인을 지키고 서있었는데 역시 무인석은 눈매를 매섭게 부라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석양과 석호가 세종을 호위하듯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봉분 앞에서 남으로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하며 역시 명당은 명당인가 보다 하며 다들 감탄사를 연발했다. 봉분을 배경으로 찰칵, 또 탁 트인 자연을 배경으로 찰칵. 소풍의 즐거움 중 하나는 역시 기념 촬영인가 보다.
능을 내려오다 보니 수복방 못미처 세종의 일대기를 적은 비가 서있었는데, 아쉬운 것은 모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글자 자체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보였어도 무슨 얘기인지 몰랐을 것이다. 세종의 일대기를 왜 한문으로 기록해야 했을까? 왜 한글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의 뜻은 고인을 모신 영릉에서조차 실현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이 짧아도 한참 짧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렇게 훌륭한 글자를 만들고 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면서도 그 아름다운 정신과 문명을 계승하지 못해 근대의 문턱에서 큰 시련을 당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이 날은 상명대학교의 최기호 교수님이 오셔서 세종과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특강을 해주셨다. 정자각 옆 잔디밭이었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최만리의 후손이지만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정말로 값진 선물이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인상 깊었다. 6시쯤 광화문에 도착하여 뒤풀이를 하는데 누군가 그랬다.
“솔직히 아침에 버스 탈 때까지만 해도 단풍놀이 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의미 있는 답사일 줄은, 아무튼 정말 좋았어요!”
2004년에는 한글문화기행을 떠나지 못했고, 2005년에는 역사 유적이나 박물관 답사 등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이야기’라는 여행사와 인연이 되었다. 2005년 10월 23일 아침 8시 30분, 연대 회원과 일반참가자들을 포함해서 40명. 이번 답사에는 본디 세종의 능이 있던 헌인릉이 첫 번째 답사지로 추가되었으며, 운영위원 이동우(개그맨), 회원 양희성(개그맨)이 참가해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해 주었다.
그 날 난 두 여자 어린이의 돌발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 영릉을 참배하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정자각을 지나 참도에 들어설 즈음 두 여자 어린이가 갑자기 잔디밭에 뛰어들더니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능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절을 하며 서로 주고받는 얘기가 바람을 타고 내 귀에까지 들렸다. 그것은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감동이었다.
“세종대왕님께 절을 올려야지. 꼭 절을 하고 가야해.”
“한글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2006년 제4회 한글문화기행은 11월 19일에 이루어졌다. 참으로 작은 규모의 기행이었다. 참가자는 글쓴이와 유재경 간사를 포함해 모두 10명이었다. 참가 신청이 거의 없어 기행을 포기할까 고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몇 분이라도 신청한 분들이 있으니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작은 승합차를 한 대 빌려 글쓴이가 직접 운전을 했다.
2008년 제6회 기행은 국립국어원의 뜨거운 후원으로 서울 지역의 공부방 아이들 100여 명을 초청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기행 날짜는 10월 4일로 결정하였고, 이성태, 김명진, 이건범 위원을 중심으로 기행 준비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사단법인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를 통해 기행에 참가할 공부방 아동들을 모집하였고 답사 진행은 여행이야기가 맡았으며, 아이들이 입을 한글옷도 제작하였다. 그리고 기행 소식을 접한 한솔교육에서 ?우리 민족문화 상징 100? 200질을 협찬해 주었다.
일정은 서울 출발(8시)-신륵사-영릉-점심(도시락)-견학 및 참배-어울림 마당-동그라미가새맞히기대회-명성황후 생가- 저녁 식사-귀가(21시)였으며, 어울림 마당 진행에는 전문 레크리에이션 강사, 동그라미가새맞히기대회 진행은 개그맨 고해성과 강일구가 수고해 주었다.
제7회 한글문화기행은 뜻하지 않은 복병 신종 플루 때문에 취소되었다. 천재지변과도 같은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 이 해에 난 생전 처음 연극에도 출연하고 있었다. 천재적인 희극 작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미국의 닐 사이먼 작품이었다.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을 모아 희곡화 한 것으로 삶을 잘근잘근 곱씹게 하는 작품이다. 물론 희극이므로 무지하게 웃기지만, 웃다 보면 어느 새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연극이다. 그리고 이 연극은 19금이 아니기에 청소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종 플루는 모든 것 앗아갔다. 영릉답사도 날아갔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위험하다는 경고 때문에 극장은 썰렁했다.
작년 가을에는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일본 친구 두 사람이 비행기를 서울로 날아왔다. 경복궁, 창덕궁, 광화문 광장, 남산, 수원 화성 등등 안내하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영릉을 택했다. 신륵사는 공사 중이라 경내가 어수선했지만, 영릉에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떨어지고 있어 걷기에도 그만이었다. 일본 왕의 무덤처럼 거대하지는 않지만, 아담한 봉분 아래 잠들어 계신 분이 한글을 만든 왕이라니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떠냐고 묻자,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 영릉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이고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올 가을에는 한번 떠나보자, 영릉으로!
- 이 글은 민족21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