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11) 한글날을 아시나요?

봄뫼 2012. 11. 12. 17:29

빨간 날이 아니면 잊어버린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한글날이 109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64% 정도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2009년에는 88.1%가 알고 있었다고 했는데, 2년 사이에 24.1%가 떨어졌으니 정말로 빨간 날이 아니면 잊어버리나 보다.

 

노태우 대통령을 기억하는가? 1987년 대선 때 민정당 후보로 출마했다. 늘 보던 정치인이 아닌 낯선 얼굴이었는데,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고 자신을 선전하더니 당선되었다. 19882월부터 임기를 시작해 19932월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5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떤 이들은 88올림픽을 떠올릴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이들은 중국·소련과 수교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기억하는 것이 다르고 기억하고 싶은 것도 다르겠지만, 글쓴이는 노태우를 한글날을 없앤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벌써 11년 전인가 1991년부터 한글날은 노는 날이 너무 많아 생산력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한글이 논다는 말도 한글이 생산력을 떨어뜨린다는 말도 그때 처음 들었다. 한마디로 한글의 고마움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처분이었다.

 

한글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이 가능했을까? 영어학자 김미경 교수는 ?한국어의 힘?이란 저서에서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으로 한국어를 꼽았다. 근대화에 실패한 한국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는 등 암울한 역사의 시기를 경험했지만, 해방 후 단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김미경 교수는 한국어만을 사용하는 단일 언어 사회의 힘, 곧 한국어의 힘을 말했다.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했기에 의사소통도 잘 되고 단합도 잘 됐다는 거다.

 

단일 언어 사회였기에 눈부신 성장이 가능했다는 주장에 100% 동의하면서 글쓴이는 한글의 힘을 덧붙이고 싶다. 한국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문자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한글이 있었기에 지식과 기술의 습득, 과학의 발전이 가능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한글이 만들어진 15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한자를 빌려서 글을 써야 했던 선조들은 한자를 배우느라 고생깨나 했다. 그런 고생도 선택받은 양반 계급에만 주어진 특혜였다. 공부할 수 있는 권리,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권리는 한자와 더불어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다. 상민도 과거를 볼 수 있었다지만, 먹고 살기 바쁜데 언제 글자를 배우나? 그러니까 보통 사람은, 상것들은 쳐다볼 수도 없는, 한자는 그런 것이었다.

 

집안 어르신들 말씀이 맞다면 글쓴이는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다. 옛날에 태어났어도 손에 흙 안 묻히고 서당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다가 과거에 장원급제라도 하면 암행어사 출두를 외치며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만일 뼈대 없는 가문의 후손이라면 어땠을까? 도련님들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한 서당 앞마당을 쓸고 있거나 뒤꼍에서 평생 장작이나 팼을지 모른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산에 들어가 팔자에 없는 산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바뀐 것은 봉건제가 무너지고 신분의 차별이 없어지고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주어진 민주의 시대가 찾아온 덕이겠지만, 한글의 탄생 또한 민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새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15세기에 성왕 세종이 우리에게 준 고귀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사대주의와 우리의 무지가 한글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서글픈 운명의 족쇄를 풀지 못했다.

 

만일 한글의 가치를 좀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그래서 한글의 시대가 좀더 일찍 열렸더라면 근대화에 실패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때때로 가정은 미래를 위한 준비로서 의미가 있다. 다시는 차별 받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는 한글을 업신여기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준비 말이다.

 

한글은 그런 의미를 갖고 있고, 한글날은 그런 한글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2005년에 국경일이 되었지만, 국경일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지만, 빨간 날이 아닌 국경일은 무늬만 국경일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유감스러운 566돌 국경일 한글날이 평일과 다름없이 썰렁하게 지나갔다.

 

한글날을 처음 기념한 것은 19231227일이었다. 겨레의 위대한 스승 주시경의 제자들이 만든 조선어연구회가 처음으로 훈민정음 창제 8회갑(480)을 기념했다. 3년 후인 1926년에는 창제가 아닌 반포 8회갑을 기념하였는데, 세종 28년 음력 929일을 훈민정음 반포일로 보았고, 그로부터 8회갑이 되는 음력 929일을 가갸날로 정하고 기념축하회를 열었다.

 

신문도 가갸날을 축하했다.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이 씨슨 이 위에 가갸날이 낫서요. 끝없는 바다에 쑥 소서오르는 해처럼 힘 잇고 빗나고 두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조코 씨슨보다 알기 쉬워요.” 축일이나 제삿날 그리고 데이와 시즌 위에 가갸날이 태어났고, 데이와 시즌보다 읽기도 좋고 알기 쉽단다. 한자보다 좋고 영어보다도 우리의 가갸글, 곧 한글이 좋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가갸날이었다. 그런데 1928928일에는 가갸날이 아닌 한글날이 되었다. 당시 한글은 낯선 이름이었다. 훈민정음으로 태어난 우리글은 오랫동안 한자에 눌려 언문이나 암클로 불렸다. 한자를 진서라 하고 우리글을 언서라 했던 것도 우리글이 2등 글자였다는 서러운 증거였다. 아니 우리 땅에서 우리글이 왜 2등 글자 취급을 받아야 했을까?

 

고종을 나약한 왕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지만, 오랫동안 푸대접받던 언문을 처음으로 국문으로 선포한 이가 고종이라면 고종의 이미지가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고종의 국문 선포는 한자와 언문의 위상을 뒤엎는 대변혁이였으며 청나라와 연을 끊고 자주 국가를 표방한 대역사였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더 이상 국문을 국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더 이상 국문을 국문이라 부를 수 없는 상황에서 탄생한 이름이 바로 한글이었다면 믿으실까? 그러고 보면 한글은 암울했던 식민지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는 이름이다. 뭐라고 부르지? 조선글, 가갸글, 우리글 어쩌고 하다가 툭 튀어 오른 이름이었다. 한글이란 이름을 처음 지은 사람이 최남선이라는 설과 주시경이라는 설이 맞서고 있지만, 글쓴이는 주시경이 세운 국어 연구 단체 국어연구학회가 배달말글몯음, 한글모로 이름을 바꾸는 과정에서 한글이 난 것에 오늘날 한글 이름의 정통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한글을 널리 알린 것도 주시경의 제자들이었다. 신명균, 김윤경, 정열모, 최현배, 장지영 등은 가갸날의 이름을 한글날로 바꾸었고, 잡지 ?한글?을 발간하여 한글을 널리 알렸다.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한글을 연구하고 한글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210월에는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 모두 옥살이를 하는 등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어, 훈민정음이 정통 119월 상순에 반포되었음을 확인되었고, 한글날은 양력 109일로 시정되었으며, 해방 직후인 1946년 미군정은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서울대학교 초대 총장이 파란 눈의 미국인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한글의 가치를 알고 공휴일로 지정한 것도 미군정이었다니 왠지 또 한 번 불필요한 신세를 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때는 임시 공휴일이었다. 정식으로 법정 공휴일이 된 것은 1949년부터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에 따라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한 것이다. 한글의 가치를 가슴 깊이 깨달았기에 그 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러니 1990년 한글날 공휴일 폐지 결정은 반 역사적이다.

 

올해도 한글날은 까만 날이었다. 빨간 색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년에는 빨간 색으로 바뀌기 바란다. 빨간 색이 아니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미 만시지탄이지만, 내년에는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자주적인 한글문화를 끊임없이 재창조할 수 있는,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뜻 깊은 빨간 한글날을 기대한다.

 

- 이글은 민족21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