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우슈우에서 한글의 장점을 생각하다
2016년 8월 22일 아침, 후쿠오카(福岡)에서 자동차를 몰고 서쪽으로 달려 가라츠성(唐津城)에 도착했다. 맑다 못해 투명한 하늘, 뭉게구름, 해안가에 자리 잡은 소도시의 한적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가라츠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가신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가 1608년에 완성했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모래톱이 학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고도 불린다.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천수각은 1966년에 터만 남은 가라츠성을 문화관광시설로 복원할 때 다시 지어진 것이다.
가라츠성 아래 작은 다리를 건너면 니지노마츠바라(虹の松原)다. 가라츠시청까지 이어지는 202번 국도가 마츠바라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데, 길이가 무려 4.5km에 달한다. 숲의 폭은 500m다. 니지노마츠바라는 일본의 3대 송림 중 하나인데, 가라츠번의 초대번주인 데라자와가 조성한 숲으로 약 100만 그루의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서서 거센 바닷바람을 막아준다. 이 방풍림 덕분에 가라츠 사람들이 안전하게 땅을 가꾸며 살 수 있었다. 데라자와의 선견지명이 낳은 결과다.
마츠바라에서는 녹음이 우거진 송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바다, 푸른 하늘과 바람이 그려 놓은 하얀 구름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지만, 유명한 가라츠바가(唐津バーガー)도 맛볼 수 있다. 숲 중간에 있는 주차장에 햄버거 트럭이 서있다. 가라츠바가는 전통 음식은 아니지만, 가라츠의 명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전주의 초코파이가 유명해진 것과 비슷하다.
가라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요부코(呼子)항이 있고, 인근에 자리했던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은 조선 침략을 위해 만들어졌다. 한국인들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1592년에 축성했는데, 공사 시작하고 불과 8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산정에 펼쳐진 넓은 터에 전쟁을 위한 시설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이지만, 규슈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천수각(天守閣)이 섰던 본전 터에 가면 그 이유를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망망대해를 가로막고 선 몇 개의 섬이 눈 아래 펼쳐진다.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는 섬이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가카라지마(加唐島)다. 무령왕은 여기서 태어나 살다가 귀국한 후에 왕위에 올랐다. 무령왕 탄생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는 고대 한국과 일본의 깊은 관계를 들려준다.
가카라지마 뒤로 보이는 섬이 이키섬(壱岐島)이다. 그 옆으로 아스라이 쓰시마(對馬島)가 보인다. 쓰시마에서 부산까지 불과 49km 정도이니,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이렇게 가깝다. 열 걸음만 움직여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무더운 날이었지만, 투명할 정도로 맑은 날씨가 정말로 고마웠다. 가라츠에서 배를 타고 이키섬으로 간 다음 눈앞에 보이는 쓰시마를 거쳐 한반도에 이른다. 거꾸로 가는 뱃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산에서 쓰시마로 이동한 다음, 이키섬을 경유해 가라츠에 닿는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도 해류와 바람을 잘 이용하면 오갈 수 있었다.
나는 규슈를 배경으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고대에는 한국이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천황가는 백제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근대에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강제동원, 군위안부, 독도 등의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인정할 것 인정하고 서로 이해하고 도우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 이외에 답은 없다.
이제 꼭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며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규슈’라고 부르는 곳은 현지에서는 ‘큐우슈우(九州)’라고 한다. 한글로 원지음에 가깝게 ‘큐우슈우’라고 쓸 수 있지만, 외래어표기법 때문에 ‘규슈’로 써야 한다. 외래어표기법이라는 게 한국어를 쓰는 우리가 편하도록 만든 것이라지만, 그 바람에 어떤 소리든지 가깝게 표기할 수 있다는 한글의 장점을 우리 스스로 죽이고 있다. 일본인들은 맥도날드를 ‘마쿠도나르도’, 햄버거를 ‘한바가’라고 한다. 일본의 가나문자로는 ‘맥도날드, 햄버거’라고 발음하도록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는 시대에 따라 바뀐다. 일본어를 적을 때 어두에 격한 소리가 오지 않도록 하고, 장음을 표기하지 않도록 한 규정을 고치면 일본어는 원지음에 가깝게 적을 수 있다. 물론 ‘규슈’를 ‘큐우슈우’, 가라츠를 ‘카라츠’, 도요토미를 ‘토요토미’, 데라자와를 ‘테라자와’, 가토 기요마사를 ‘카토우 키요마사’, 쓰시마를 ‘츠시마’로 적으면, 당장은 앞 표기에 익숙한 우리 눈이 상당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겠지만, 지금이라도 고치는 것이 한글의 장점을 살리는 길이다.
정재환 | 방송사회자, 문학박사,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 젊었을 때는 연예계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한글 운동과 역사 공부를 시작하면서 삶이 달라졌다. 우리말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고, 한글학회 활동 연구로 2013년에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YTN 재미있는 낱말풀이, 대구KBS 시사라이브7을 진행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면서, 《큐우슈우 역사기행(가제)》을 쓰고 있다.
위 글은 독서신문 책과삶 193호에 실렸습니다. http://www.bookandlif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