팃포탯과 맞대응전략
우리말에 외래어나 외국어를 섞어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고, 한 발 더 나아가 그런 섞임을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는 이른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쉰다. 나는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순수한 토박이말과 토박이 문체로 이루어진 한국어 속에서라면 나는 질식할 것 같다. - 고종석 감염된 언어
이런 생각에 무릎을 탁 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에게 외래어, 외국어를 남용하지 말자고 해도 소 귀에 경 읽는 격이겠지만, 그래도 찍찍 끌리는 소리가 나는 고물 레코드판을 다시 한 번 용감하게 돌려보겠습니다.
순혈은 없을 겁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동과 교류, 섞임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교류하고 이동하고 주고받고 섞이고 어우러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1세기에 순혈을 고집한다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바보거나 천치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정체성은 무시할 수 없고, 언어 정체성 역시 고려되어야 합니다.
아시아경제 2020년 3월 7일자에 '빗장 건 일본에 한국 '팃포탯' 선택..9일 한·일 입국조치 충돌'이라는 기사가 떴는데, 팃포텟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뭔 소리지? 기사 본문을 읽어보고서야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도 일본에 빗장을 걸어 잠궜다. 충분한 사전 협의 없이 기습 결정된 일본의 입국제한 강화 조치에 한국 정부는 하루 만에 '팃포탯'(tit-for-tat·맞대응)' 전략으로 응했다.
https://news.v.daum.net/v/20200307143132821
그동안 우리가 맞대응전략이라고 하던 것을 ‘팃포탯’을 앞세우고, ‘맞대응’은 괄호 안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팃포탯?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을 보니, '팃 포 탯(tit for tat)'은 '상대가 가볍게 치면 나도 가볍게 친다'는 뜻으로, 팃포탯 전략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처럼 상대가 자신에게 한 대로 갚는 맞대응 전략을 말한다고 합니다.
맞대응전략 대신에 굳이 팃포탯을 쓴 기자 덕분에 오늘도 어려운 영어 표현 하나 배웠습니다만, 외래어 혹은 외국어 사용이 때때로 불가피하다고 양보합니다만, 이런 식으로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2020년 3월 5일자 [열린마당]에 '코로나19 용어 쉬운 우리말로 당국·언론 종사자부터 모범을'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지난 2일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코로나19’ 관련 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국민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코로나19 정보를 전달받는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말(飛沫)’은 ‘침방울’로, ‘코호트 격리(cohort isolation)’는 ‘동일 집단 격리’로, ‘진단 키트(kit)’는 ‘진단 도구’로, ‘의사(疑似) 환자’는 ‘의심 환자’로,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는 ‘승차 진료(소)’로 바꿔 사용하는 것이 그 예다.
http://www.segye.com/newsView/20200305516857
쉬운 우리말을 쓰자는 국어원의 권유를 소개한 분은 배연일 포항대 교수인데요, ‘국민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코로나19 정보를 전달받는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배 교수님이 이 글을 기고한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낯선 용어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모니터링(monitoring)’은 ‘관찰(또는 감시)’로, ‘팬데믹(pandemic)’은 ‘확산’ 또는 ‘범유행’으로, ‘케어(care)’는 ‘관리’나 ‘보살핌’으로, ‘팩트(fact)’는 ‘사실’ 또는 ‘진상(眞相)’으로 바꾸어 쓰면 좋을 것 같다. 또한 ‘기저 질환자’는 ‘평소에 어떤 병(病)을 가진 사람’으로 바꾸면 어떨까 한다.
http://www.segye.com/newsView/20200305516857
코로나19 뉴스를 들으면서 부스러기영어와 낯설고 어려운 전문 용어들 때문에 어리둥절할 때가 많았는데, 듣기만 해도 속이 좀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은 어려운 말을 자주 쓰는 경향이 농후한데, 배 교수님 같은 분이 있어 다행입니다. 아무 말 대잔치 같은 기사를 쓰거나 사실 확인도 없이 가짜뉴스를 써대는 것도 문제지만, 처음부터 ‘맞대응전략’이라고 해도 될 것을, 심지어 그동안 죽 그렇게 써왔던 것을, 굳이 ‘팃포탯’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들께 외래어 및 외국어 남용에 잘 듣는 백신이라도 한 첩 달여서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202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