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대화

사장님, 사모님, 어머니, 아주머니, 아가씨...

봄뫼 2020. 3. 22. 14:10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상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홍길동 씨'라고 하면, ‘? 씨라고?’ 하면서 기분 나빠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에 대한 오해 때문이지만 ''는 상대를 낮춰 부르거나 얕보는 호칭은 결코 아닙니다.

 

: 의존명사

(성년이 된 사람의 성이나 성명, 이름 아래에 쓰여)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공식적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 표준국어대사전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는 말이라는 뜻풀이가 먼저 나옵니다만, 곧이어 이어지는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는 풀이가 당혹스럽습니다. 앞을 따른다면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호칭이지만, 뒤를 따른다면 잘못 썼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라는 호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왕년에는 또래나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상대에게 자연스럽게 가장 무난하게 쓰던 호칭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를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누리그물(인터넷)에 님이 등장했고, '동수 님, 샛별 님'처럼 자주 씁니다. 그래도 입말에서 ''선생님, 집배원님, 기사님, 미용사님처럼 앞말에 붙여 쓸 때 외에는 몹시 어색합니다. 그러고 보면 말은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도 실감나고, 때와 장소, 상황 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국민일보 2020314일자에 최현주 작가님이 쓴 '저는 사모님이 아닙니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매장에 들어오는 중년남자들은 모두 사장님들이다. 만년 과장도 사장님이고 구조조정으로 밀려난 부장도 사장님이다. 실업자라도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혹시 이들이 쓰는 사장님이 社長이 아니라 스승이나 나이 많은 어른을 뜻하는 師長은 아닌가 궁금했다. 국립국어원에 문의해보니 그 뜻으로 쓰는 말은 아닐 거라는 다소 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내 짐작에도 회사 대표라는 뜻으로 쓰는 사장이 맞을 것이다. 직업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다. “손님은 꼭 사장님처럼 (돈이 많아) 보이니, 이 정도쯤은 망설이지 말고 사세요.”

- 최현주의 알뜻 말뜻,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27459

 

   국립국어원에 문의까지 하실 정도로 '사장님'이라는 호칭에 궁금증이 크셨나 봅니다. 국립국어원 가나다전화(1599-9979)에서 무엇이든 친절하게 답변을 해 주지만, 최 작가님의 질문에는 쉽사리 답할 수 없었을 겁니다. 낱말의 뜻을 떠나 일상에서 쓰이는 사장님에 대한 최 작가님의 생각은 '상업적 속내'에서 만들어진 호칭이라는 것이지요. 70%쯤은 동의합니다만, 비단 '매장'에서 손님을 상대로만 쓰는 것이 아니고 광범위하게 애용되는 호칭 사장님이야말로 '어떻게 불러야 하나? 직업이 뭘까, 나이는 얼마나 드셨을까?' 하는 반복되는 고민과 망설임 끝에 건져낸 호칭일 겁니다.

 

사장님이라고 하면 되겠지. 사장님이라고 하는데 언짢아하지는 않겠지? 일단 높여주면 되지 않아?

 

   ‘사장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자신이 한없이 비굴해지는 것도 아니니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써먹을 수 있는 편리한 국민 호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높이겠다는 생각은 좋지만 최 작가님이 지적한 것처럼 부장이나 과장이나 심지어는 실직 상태에 있을 수도 있는 상대에게 무턱대고 '사장님'이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슬기로운 언행은 아닐 겁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동안 나이 드신 분들께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사모님이 남성의 존재에 기댄, 여성을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호칭이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니 역시 사람은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나 봅니다. 최 작가님의 의견을 따라 사모님보다는 여사님이나 아주머니, 아주머님이 한결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재래시장, 마트에서 삼사십대 이상의 여자에게 거리낌 없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또 어떤가? 어머니라는 말의 지극한 포용력에도 불구하고 이 호칭은 지나치게 획일적이거나 심지어 폭력적이다. 비혼가구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한 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0.92명으로 한 명의 자녀도 갖지 않는 여성이 많아진 요즘 시대, 설령 기혼자라고 해서 어찌 다 어머니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여성 고객을 굳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어머니라면 이런 것은 꼭 사셔야 합니다.

- 최현주의 알뜻 말뜻

 

   이렇듯 최 작가님은 혼자 사는 여성도 많고 결혼을 했더라도 출산 경험이 없는 나이 지긋한 여성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도 출산율 0.92에 불과한 현실을 외면한 시대착오적인 언어 사용이고, 모든 여성을 '어머니'라 부른 것 또한 미혼모, 기혼이지만 무자녀 여성 등등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이라 지적합니다. 그리고 포용력이 지극한숭고한 우리말 '어머니'에도 아이들을 생각하는 어머니라면 이런 것은 꼭 사셔야 합니다.”라는 상술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여성을 만날 때마다 미혼인지 기혼인지 출산 경험이 있는지를 묻고 상대방의 처지에 맞게 호칭을 찾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요, 사장님이나 어머니나 모두 상술이 낳은 호칭일 수 있고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어머니가 이렇게 널리 쓰이게 된 배경에는 방송의 책임이 큰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로 아주머니들이 방청객인 아침 방송에서 사회자가 방청 온 아주머니들을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들으셨죠? 어머니들, 박사님 말씀에 동의하시죠?

 

   이 한마디로 방청석에 앉아 있던 나이 든 미혼 여성도 어머니가 되어 버렸습니다. 최 작가님 표현을 빌리면 얼마간 '폭력적'입니다. 여하간 이렇게 전파를 타기 시작한 '어머니'가 전국을 덮쳤고, 식당이나 농촌 마을을 취재하러 나간 방송 리포터들까지 가세해 전국의 나이 든 여성들을 어머니와 더불어 이모로 만들었습니다. 하긴 어머니와 이모가 한 쌍으로 어울리는 것은 태생적으로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어머니, 땀 좀 닦으세요.

이모, 이 김치에는 뭘 넣으신 거예요.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뜻에서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초기에는 '어머니'란 말을 듣고 당황해하신 분들도 많았고, 아가씨 같은 딸을 둔 적이 없다고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께서도 농담으로 받아치신 거였겠습니다만, 여하간 그 후로 어머니와 이모는 집에서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들이 어머니이고 이모라니 좀 놀랍기도 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진짜 어머니와 이모는 누구인지 어디에 계신지 소리쳐 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또한 최 작가님이 지적했듯이 방송이 부린 상술일 수 있겠군요.

   과거에는 가까운 친구의 어머니를 뵐 때,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거기까지였고 그 외에는 아주머니라고 불러 어머니와 아주머니를 구분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아주머니란 호칭을 참으로 듣기 어려워졌습니다만, 아주머니는 사용하는 데 전혀 손색이 없는 호칭입니다.

 

1부모와 같은 항렬의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2남자가 같은 항렬의 형뻘이 되는 남자의 아내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3남남끼리에서 결혼한 여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

- 표준국어대사전

 

   ‘남남끼리 예사롭게 부르는 말이라는 풀이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윗사람에게 쓰던 호칭이었습니다. 물론 이미 국민 호칭이 되어 버린 어머니와 이모를 몇 줄의 글로 아주머니로 되돌리겠다고 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거나 언 발에 오줌을 누는 어리석은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호칭을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것도 좀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아가씨도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아가씨'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가 유행하면서 '아가씨'란 호칭에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 호스티스'라는 부정적인 인상이 덧씌워졌고 사람들은 '아가씨'라는 호칭 사용에 신중해지다가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생각 없이 '아가씨'라고 했다가 '아가씨가 뭐예요? 학생이에요.'라는 날카로운 반격에 몸을 움찔했던 아저씨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본디 아가씨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1시집갈 나이의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2손아래 시누이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아기씨.

3예전에, 미혼의 양반집 딸을 높여 이르거나 부르던 말.

- 표준국어대사전

 

   '예쁘게 차려입은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잔디밭에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뾰족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바쁘게 걸어왔다.'는 예문에서 술집과는 도통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의 시처럼 아가씨도 '아가씨'라고 부를 때 비로소 아가씨가 될 겁니다. '아가씨'라는 세 글자의 어울림도 예쁘고, 은근한 목소리로 아가씨라 부르면 울림도 아름답습니다.

   게다가 아가씨라는 말을 되살리면 '학생'이 아닌 젊은 여성을 어찌 불러야 하나 하는 고민도 더 이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 보이니 학생일까? 가방을 들었으니 학생일까? 화장을 했으니 학생이 아닐 수도 있을까? 치마가 짧으니 학생이 아닐 수도 있나? ‘, 그리운 아가씨!’ 더 늦기 전에 사라져가는 우리말 '아가씨'를 되찾고 싶습니다. ‘담배 가게 아가씨를 당당히 아가씨라 부르고, 젊은 여성을 만나면 아가씨라고 다정하게 부르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김홍철의 요들송 아름다운 스위스 아가씨를 함께 들어보시죠.

 

저 알프스에 꽃과 같은 스위스 아가씨

귀여운 목소리로 요를레이디~

발걸음도 가볍게 산을오르면

목소리합쳐서 노래를하네

그 아가씬 언제나 요를레이디-에이에이

요를레이 요를레이디

...

귀여운 그아가씨 손을맞잡고

사랑을 고백했네 요를레이디

메아리를 높이높이 울려퍼지고

그 마을은 너도나도 흥겨웁다네

 

202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