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판 오 분 전이 아니고 개판
‘개판 오 분 전’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바야흐로 개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언어 사용에서 접두사 '개'가 너무 설치고 있지요. '개'가 없으면 어떤 표현이 가능할까 싶은 걱정마저 듭니다. 본디 접두사 '개'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참사랑’, ‘참뜻’의 ‘참-’이 ‘진짜’ 또는 ‘진실하고 올바른’, ‘품질이 우수한’ 등의 뜻을 더하는 데 반해 ‘개철쭉’, ‘개수작’, ‘개망나니’의 ‘개-’는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 ‘쓸데없는’ 등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다. 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한’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 [똑똑 우리말] 접두사 ‘개-’/오명숙 어문부장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3144688
개떡은 질이 떨어지는 떡이고, 개꿈도 헛된, 쓸데없는 꿈을 뜻합니다. 개자식도 욕에 가깝고, 개잡놈은 정도가 심한 잡놈을 뜻합니다. 따라서 '개'는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 접두사라 할 수 있습니다. '개무시', '개고생' 같은 말을 문제 삼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최근 '개'가 아무 데서나 쓰이고 있습니다.
‘개꿀’, ‘개이득’, ‘개멋져’ 등의 표현을 접한 건 몇 년 전이다. ‘매우’, ‘정말로’라는 뜻으로 ‘개-’가 쓰인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때 반짝 쓰이다 말겠지 했다. 하지만 부정적 뜻을 더하던 ‘개-’가 긍정적인 뜻의 낱말들과 결합하면서 쓰임이 날로 확장돼 가고 있다. 명사 앞에서만 쓰이던 것이 동사, 형용사, 부사 등 품사를 가리지 않는다. 그에 더해 ‘개-’가 결합하는 순간 가볍고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이런 추세라면 ‘개-’의 사전적 뜻풀이에서 ‘부정적’이란 표현이 사라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개'의 용례도 많습니다. '개 좋아', '개 많이 올랐다' 등등 이루 다 지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 문제는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개'를 긍정적인 '개'로 바꾸어 쓰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전적 풀이에서 부정적이란 표현이 사라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평소 '이런 말이 맞아요.'라는 글을 쓰는 분의 견해로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개'로 인해 언어생활이 빈곤해진다는 겁니다. '개 이득, 개 좋아, 개 많아' 식으로 오로지 '개'만 사용하는 것보다는 '큰 이득, 아주 좋아, 정말 좋아, 몹시 많아' 등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2020년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