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환의 우리말 비타민

전 재산을 말아 먹어?

봄뫼 2021. 10. 14. 22:30

  친구가 사업 실패로 재산을 말아 먹었다.’라고 하면, 몹시 안타까워하시겠습니다만, 앞의 문장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말로 할 때는 말아먹다말아 먹다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만, 글을 쓸 때는 문제가 됩니다.

 

말아먹다/말아 먹다전 재산을 말아먹었다/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처럼 구별해 써야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 [바른말 광] 918. 전 재산을 말아 먹어?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1080418490203084

 

  ‘말아먹다재물 따위를 송두리째 날려 버리다.”는 의미이고, ‘말아 먹다밥을 국에 말아 먹었다.”처럼 국에다 밥을 넣어서 먹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위 글에는 이렇듯 헷갈리는 표현들에 대한 날카로운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명분 없는 투표시간 연장 반대

어느 신문 칼럼 제목이다. 칼럼은 투표시간 연장 반대가 명분이 없다는 내용을 다뤘다. 한데, 이 제목은 좀 모호한 구석이 있다. 투표시간 연장이 명분이 없어서 반대한다는 뜻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명분 없는투표시간 연장 반대가 아닌 투표시간 연장만을 꾸밀 수도 있는 구조여서 그렇다. 그러니 본문에 맞추자면 명분 없는, 투표시간 연장 반대투표시간 연장 반대, 명분 없다라야 했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명분 없는 투표시간 연장 반대투표시간 연장 반대명분 없다로 작은따옴표를 활용하는 것. 간단한 문장부호 하나로 혼란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제목은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아니라, 편집부에서 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만, 언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글을 보면서 낯빛이 붉어질 것입니다. 저도 좀 긴장을 했습니다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기자님의 글을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안전한 원전 해체.’

이 말은 안전하게 원전 해체를 한다는 뜻으로 썼는데, ‘‘안전한 원전을 해체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러니 안전한 원전 해체’’라야 헷갈리지 않을 터인데, 아래처럼 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안전한 원전해체.’

이렇게 붙여 쓰면 어쩔 수 없이 안전한원전이 아니라 원전해체전체를 꾸밀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게 바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띄어쓰기의 힘이다.

 

어떤 분은 띄어쓰기가 어려우니 없애자고도 합니다만, 결코 없앨 수 없는 이유를 확인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띄어쓰기를 잘못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아래는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에 나오는 구절.

문어의 조리법과 약효를 규합총서에서는 돼지같이 썰어 볶으면 그 맛이 깨끗하고 담담하며, 그 알은 머리··보혈에 귀한 약이므로 토하고 설사하는 데 유익하다. 쇠고기 먹고 체한 데는 문어대가리를 고아 먹으면 낫는다.” 하였다.’

여기서도 띄어쓰기가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말이 있다. 바로 문어대가리라는 말.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보자.

*문어대가리: 문어의 대가리라는 뜻으로, ‘대머리를 낮잡아 이르는 말.

, ‘문어 대가리로 쓰면 말 그대로 문어 대가리이지만, ‘문어대가리로 붙여 쓰면 대머리를 낮잡아 가리키는 말이 되는 것. 그러니 나무위키 설명은 인육을 먹으라는 말이 되는 셈이다. 띄어쓰기 한 번 잘못하면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뜻이 바뀌어 버린다.

 

  문어와 대가리를 붙였을 때, 대머리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는 것을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띄어쓰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니,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긴장하게 됩니다만, 한편으로는 문장부호의 쓰임새나 띄어쓰기를 잘 하면 정말 우리글을 멋지게 쓸 수 있을 겁니다.

 

202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