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말씀 6: 백성이 먹고 사는 일이 정치의 우선이다
세종은 백성이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짓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세종 11년(1429년)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정리한 <<농사직설>>을 편찬했으며, 고을 수령들에게는 백성이 때를 놓치지 않고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독려했습니다.
<농사를 권면하고 독책하는 내용의 교서를 내리다>
교서를 내렸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 법이니, 농사는 입고 먹는 것의 근원이며 왕자(王者)의 정치에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직 백성의 천명(天命)에 관계되기 때문에 천하의 매우 수고로운 일에 종사하는 것이니,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백성을 이끌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서 농사에 종사하여 만물을 끊임없이 생육하는 즐거움을 완수하게 할 수 있겠는가.
저 옛날 신농씨(神農氏)는 처음 농기구를 만들어 천하를 이롭게 하였고 소호씨(少昊氏)는 구호(九扈)에게 명하여 농사를 관장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성한 임금들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법을 만들고 백성들을 위하여 천명을 세운 까닭이다. 요(堯) 임금은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공경히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알려 주게 하였고, 순(舜) 임금은 십이목(十二牧)에게 이르기를 먹는 것은 농사철을 잘 맞추는 데 달려 있다고 하였으며, 우(禹) 임금은 치수(治水)에 힘을 다 쏟았고, 상(商)나라 조갑(祖甲)은 백성이 의지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았으며, 주(周)나라에 이르러서는 농사로써 나라를 열어 《시경》 〈빈풍(豳風)〉의 시들과 《서경》의 〈무일(無逸)〉을 보면 농사짓는 어려움을 정성스레 여기지 않음이 없어서 오래 다스려지고 안정된 왕업을 이루게 되었으니, 성대하도다.
한 문제(漢文帝)는 자주 조서를 내려 해마다 나무 심기를 권면하고 농민에게 조세를 감면해 주어 나라 안이 부유하게 되었으며, 당 고조(唐高祖)는 지방 수령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혹한 정치를 하지 말고 농사철을 놓치지 말게 하였으며, 당 태종(唐太宗)은 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먹고 입는 것을 영위하는 바탕은 농사철을 놓치지 않는 데 있다.’라고 하여 쌀 1말이 3전(錢)밖에 되지 않는 효과를 거두었으니,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송(宋)나라 제도에는 권농사(勸農司)를 두어 연말에 그 상벌을 논하였으며, 또 지방 수령들에게 매년 술을 싣고 교외로 나가 부로(父老)들을 접견하고 농사에 힘쓰라는 뜻으로 타이르게 하였으니, 또한 농사에 대한 식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태조께서는 천운에 순응하여 나라의 터전을 여시고, 가장 먼저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작하고 우물을 파서 삶이 안정되는 이로움을 누리게 하셨으니, 그들을 권면하고 독책한 조목이 법령에 갖추어져 있다. 태종께서는 그 업적을 계승하여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을 더욱 힘쓰셨다. 특별히 어리석은 백성들이 곡식과 초목을 심고 가꾸는 일에 무지한 것을 염려해서 신하들에게 명하여 우리말로 농서(農書)를 번역하고 서울과 지방에 널리 반포하여 후세에까지 전하게 하셨다.
과인은 왕업을 계승하여 밤낮으로 두려워 경계하면서 오직 선왕 때와 같기를 바라 오직 조종(祖宗)을 법으로 삼았고, 다만 농사에 관한 일은 응당 백성과 가까운 관리에게 책임을 맡겨야 하겠기에 신중하게 선발하여 더욱 친히 효유(曉諭)하였다. 또 주현(州縣)을 방문하여 토지에 따라 이미 시험한 것을 모아 《농사직설(農事直說)》을 만들어 농사짓는 백성들이 훤히 쉽게 알도록 하는 데 힘쓰게 하였고, 혹 농사에 이익이 될 만한 것은 마음을 다하여 연구하고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그 힘을 다하여 토지에 버려지는 이익이 없기를 기대하였건만, 백성에게 저축해 둔 여분이 없어 한 해라도 농사에 실패하면 백성들이 번번이 굶주린 기색을 띤다. 이는 관리들이 나의 가르침을 받들기에 힘쓰지 않아 그대로 따르는 이가 적기 때문이니, 내가 몹시 염려스럽다.
옛날 어진 수령들이 능히 한 고을을 이롭게 하여 백성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은 것을 살펴보면, 부지런히 노력하여 이룬 경우가 아님이 없다. 공수(龔遂)는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있으면서 농사짓고 누에 치는 일을 힘써 권면하여 백성 가운데 도검(刀劍)을 차고 다니는 자가 있으면 그것을 팔아 소와 송아지를 사도록 하였으며, 봄이면 밭에 나아가게 하고 겨울이면 곡식을 수확하게 하여 백성이 모두 부유하게 되었다. 소신신(召信臣)은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으면서 백성을 위하여 이로운 일을 하기 좋아하여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지으며 논밭 사이를 돌아다니느라 집에서 편히 쉬는 날이 드물었고, 길을 가다가 샘을 보면 도랑을 파서 널리 물을 댈 수 있게 하니 백성이 그 덕을 보고 농사에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연(任延)은 구진 태수(九眞太守)로 있으면서 그곳 풍속이 사냥으로 업을 삼고 소로 밭가는 데 무지하여 늘 곤궁에 처하는 것을 보고, 농기구를 주조하게 하여 농지를 개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해마다 넓혀 나가니 백성이 모두 풍족하게 되었다. 신찬(辛纂)은 하내 태수(河內太守)로 있으면서 농사짓는 일과 누에 치는 일을 감독하고 권장하여 자신이 몸소 검사하면서 부지런한 자는 비단으로 도와주고 게으른 자에게는 벌을 내렸다. 주 문공(朱文公)은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로 있으면서 방문(榜文)을 인쇄하여 백성을 권면하기를,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고 풀을 베는 절차에서부터 삼〔麻〕과 콩을 심고 못과 방죽을 수리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자세히 열거하여 간곡하게 효유하고 때때로 직접 들판을 순시하면서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벌을 내렸다. 이 모든 일이 어찌 까닭 없이 성가신 일 하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대체로 보통 사람의 마음은 이끌어 주면 스스로 힘쓰고, 내버려 두면 게을러지는 법이다. 선현(先賢)이 말하기를 ‘막 벼슬에 나아간 낮은 관리가 진실로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구제해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하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지금 감사나 수령의 직임을 맡은 자의 경우에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한 고을의 즐거움과 근심이 제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성심으로 어루만지고 구휼한다면 어찌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농가(農家)의 일이란 일찍 시작하면 수확의 시기가 이르고, 힘을 많이 들이면 얻는 것도 많은 법이다. 그러므로 농사에 관한 정책에서 중시할 바는 오직 그 농사철을 어기지 않고 백성의 힘을 빼앗지 않는 데 있을 따름이다. 모든 곡식은 심을 때 각각 제때가 있는 법이니, 제때가 일단 어긋나면 1년 내내 따라갈 수 없다. 백성의 몸은 하나인지라 힘을 나누어 쓸 수 없는데, 이를 빼앗은 책임이 고을에 있다면 어찌 농사에 힘쓰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사람이 할 일을 이미 다 하였다면 비록 하늘의 운수가 고르지 않더라도 또한 막을 수 있는 것이니, 이윤(伊尹)의 구전법(區田法)과 조과(趙過)의 대전법(代田法)이 이것이다. 근래에 시험해 본 바를 가지고 말하자면, 정사년(1437, 세종19)에 후원(後苑)에 시험 삼아 밭을 만들고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였더니 과연 가뭄을 만나도 재해를 입지 않고 벼가 제법 잘 익었다. 이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만, 하늘의 재앙도 사람의 힘으로 구제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백성의 생계는 근면함에 달려 있으니, 근면하면 생계가 궁핍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서경》에 이르기를 ‘게으른 농부가 스스로 편하게 여겨 수고로운 일에 힘쓰지 않고 농사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수확할 서직(黍稷)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차라리 지나치게 수고할지언정 게으른 데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백성이 부지런히 힘쓰고자 하여도 권면하고 독책하기를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그 힘을 쓸 데가 없게 될 것이다.
또 망종(芒種)이라고 하는 것은 백성의 힘이 넉넉하지 않아 비록 모두 일찍 파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 시기까지만 파종하면 추수에 대한 희망이 있는 까닭에, 특별히 이러한 절후(節候)로 제한을 둔 것이니, 파종이 늦어서 농사를 망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시기까지는 파종하면 그래도 낫다는 뜻을 보인 것이지 무조건 이때를 기다려 파종할 시기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다. 농서(農書)에도 이르기를 ‘대부분 일찍 파종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수령들은 옛 습관에 익숙하여 파종할 시기가 되어도 스스로 망종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여기면서 모든 전토(田土)에 관한 소송을 즉시 처결하지 않고, 곡식 종자나 식량을 꾸어 주는 등의 일도 항상 빠르게 처리하지 않고 늘 지연시킨다. 간혹 수령이 감사에게 보고하더라도 감사가 호조에 이첩(移牒)하고, 호조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가 사유를 갖추어 나에게 알리기 때문에 전전하며 서로 왕복하는 동안에 망종이 이미 지나 버리고 만다. 어떤 이는 농사의 적절한 때를 알지 못하고 한갓 농사를 권면하고 독책한다는 명예를 얻는 데에만 급급하여 너무 일찍 파종을 독책하는 바람에 싹이 잘 자라지 못하여 도리어 농사를 해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이는 절기(節氣)의 조만(早晩)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저 혼자 어설프게 계획하여 일의 때를 놓치고 마는 자도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의 근심을 나누고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이겠는가.
무릇 나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내가 임무를 맡긴 뜻을 체득하고 조종께서 백성을 후히 보살피신 법을 준수하며, 전현(前賢)이 농사를 권면한 규율을 살펴보고 각 지방 풍토에 알맞은 바를 널리 물으며, 농서에 실려 있는 내용을 참고하여 미리 조처하되 너무 이르게 하거나 너무 늦게 하지 말며, 다른 부역을 일으켜 농사철을 빼앗는 일은 더더욱 해서는 안 된다. 각자 그 마음을 다하여 백성이 근본에 힘쓰도록 인도하여, 그들이 힘껏 농사에 종사하면서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을 양육하여 내 백성이 장수하고 우리나라의 근본이 견고해지게 하라. 그렇게 하면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예양(禮讓)의 기풍이 성대하게 일어나고, 절기가 화순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태평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세종 26년 갑자(1444) 윤7월 25일(임인) 양력 1444-09-07
출처: 온라인 한국고전번역원 세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