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박경리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가운데에서 '옛날의 그 집'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래는 시 전문입니다.
옛날의 그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 오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덩그레한 큰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심고 고추심고 상추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햇지만
책상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그 옛날의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지문의 어리석음을 탐하며 중에서 (0) | 2010.12.02 |
---|---|
봄을 만드는 농부들이 있어 (0) | 2010.11.30 |
칼레의 시민 (0) | 2010.11.27 |
유머의 조건 (0) | 2010.11.26 |
경향 11월 23일자. 김동근 교사 해임 (0) | 2010.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