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선포된 선언서(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기독교·불교계 인사 33인이 이름을 올렸다.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천도교는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명망가들의 참여를 바랐기에 여러 방면의 요인들을 접촉했는데, 500여 년간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하고 이끌어온 유학자들이 포함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지만 이들에 대한 교섭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왜 유학자들은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까
장면 ①
1919년 2월 선언서 작성을 맡은 최남선이 경학원 대제학인 유학자 김윤식을 만나 민족대표들의 뜻을 전하고 참여를 호소했다. 그러나 김윤식은 ‘독립을 선포하자는 것이 비록 사회일반의 여론이라 해도 경거망동은 불가하고, 현재 나라가 없고 정부가 없는데 누가 선언을 하느냐?’며 따져 물었고, 독립선언이란 이미 독립이 된 것을 선언하는 것이므로 ‘선언’을 해서는 아니 되고, 일본에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옳다며 거절했다.
장면 ②
한용운은 경남 거창을 방문해 영남 유림의 대표 격인 곽종석을 만났다. 곽종석은 동참 의사를 밝히면서도 선언서 내용에 왕정복고에 관한 내용이 빠진 것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용운은 다음 날 정오까지 곽종석의 최종 회답을 기다리다가 시간에 쫓겨 귀경할 수밖에 없었다. 왕정복고의 문제뿐만 아니라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신학문을 배운 자들과 행동을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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