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만 해도 방송진행자는 사자성어를 많이 알아야 한다는 말에 주객전도, 주경야독, 주과포혜, 주마간산, 주마가편 같은 말들을 억지로 외웠다. 하지만 그게 다 개폼 잡는 일이란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송언어는 정확하고 쉬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편안하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려운 한자 말은 과거보다 적게 쓰지만 알쏭달쏭한 영어 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치사량에 육박했다.
‘자유무역협정’이라고 하면 좀 알 것 같은데 에프티에이(FTA)라고 하니 감이 안 잡히고,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도’라고 하면 전문가가 아니라도 조금은 알 수 있을것 같은데 아이에스디(ISD)라고 하니 도통 모르겠다.
그나마 처음에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듯하더니 한두 번으로 땡이고 기자도 아나운서도 그냥 에프티에이, 그냥 아이에스디다.
부동산 소식에 자주 나오는 ‘디티아이(DTI)’나 ‘모기지론’도 마찬가지다. 모기지론이란 말을 들으면 ‘모기’부터 떠오른다. 문제는 이게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모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고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란다.
그렇다면 그냥 ‘주택담보대출’이라고 하면 안 될까? 디티아이는 ‘총부채상환비율’이란다. 그 비율에 따라 대출받을 수 있는 한도를 규제하는 제도가 ‘디티아이규제’라면, 역시 ‘총부채상환비율규제’라고 하면 안 될까?
‘민족00대’가 상징이던 어떤 대학은 ‘글로벌00대’로 구호를 바꾸고 모든 강좌에 영어 강의를 강요하기 시작하더니 국어 교수 채용에도 영어 면접을 하는 대학까지 돌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총장과 교수들이 깃발을 드니 학생들도 따라간다.
외솔 최현배 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 한 대학의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우리말을 포기했는지, 알림막은 온통 “好 TALK”, “OPENING”, “FOCUS on”, “TODAY”, “DESIGN” 같은 말들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최현배 선생 동상이 밤마다 눈물을 흘린다는 소문이 돌지도 모를 지경이다.
춘천 공지천에 있는 ‘작가와 소통하는 우체통’에 근사한 판화 작품이 새겨진 것까지는 좋았지만 정작 ‘우체통’은 보이지 않고 ‘mailbox’라고만 적혀 있다. 그리고 편지 투입구에는 ‘쭈쭈바’ 껍데기가 꽂혀 있다. 내국인을 위한 우체통에 ‘mailbox’라고 적는 것부터가 웃기지만 더 큰 문제는 우체통이 쓰레기통이 됐다는 점이다.
하긴 요즘에는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가지 못한다. ‘치과’는 사라지고 ‘Dental Clinic’만 영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 직후 ‘기부미쪼꼬렛’으로 시작된 영어 숭배는 독립 국가 건설과 눈부신 경제 성장, 수준 높은 시민 의식과는 관계없이 맹목적이고 중독적이다. 홈페이지와 이메일 대신 누리집과 전자우편을 쓰자는 사람들의 호소는 공허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주 정신 줄을 놓아버리면 우리말은 “요즘 스케줄이 풀이라 비지하고 타이어드해, 벗 해피!”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레알!
- 이 글은 위클리 공감에 실렸습니다.
http://www.korea.kr/newsWeb/pages/search/wsearch.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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