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학교에서 총학생회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4·19 기념식에 참가한 학생들의 늠름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는데, 사진 아래 "문대 깃발 간지나죠!"라는 글귀가 문제였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무슨 뜻인 줄 알고 썼느냐고 물었더니, "인터넷 신조어인데요, 아주 멋지고 훌륭하다는 뜻이에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가 막혔다. '간지'는 영화나 방송가에 남은 일제 잔재어로 우리말 '느낌'에 해당한다. '간지'가 좋다고 하면 느낌이 좋다는 정도일 것이다.
두 번째로 깜짝 놀란 것은 이 간지라는 말이 슬슬 돌아다니더니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에 가 붙은 걸 보고서였다. 이른바 '노간지'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말을 노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노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깜짝 놀란 것은 바로 얼마 전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는데 어떤 출연자가 "갑자기 대사가 생각 안 나는데, 3초 정도 마가 뜬 거예요. 그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몰라요"라고 했다. '마가 뜬다'는 말을 일반 시청자는 알아들었을까? '마' 역시 일제 잔재어로 '간(間)', 우리말로는 '사이'나 '틈'정도의 뜻이다.
이제 더는 곤란하다. '날마다 니주를 깔고 오도시를 생각하며 시바이를 짜내는 하루하루'를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국어 순화합시다, 일본말 쓰지 맙시다, 우리말을 사랑합시다' 위선 부리지 말고 자기반성부터 하자. 방송에 나와서 웃기고 울리는 것은 좋지만, 부끄러운 일제 잔재어는 제발 퍼뜨리지 말자.
- 이 글은 조선일보 일사일언에 실렸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24/20121024032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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