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4) 커다란 깨우침을 준 여고생 표아무개

봄뫼 2012. 11. 12. 17:19

여친 생파에 문상으로 생선하면 오나전 훈남 같겠지?”

 

무슨 말일까?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요즘 사용하는 단어를 긁어모아서 만든 문장이다. 이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 ?신구세대 소통사전?을 읽어야 한다. 뜻은 다음과 같다. 여자 친구 생일 파티에 문화상품권으로 생일 선물하면 정말 멋진 남자친구처럼 보이겠지? 이미 다 파악하셨겠지만 여친여자 친구의 줄임말이고. ‘문상문화상품권’, ‘생선은 갈치나 고등어 같은 먹는 물고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생일 선물을 줄인 말이다. ‘오나전은 좀 어렵게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타자를 칠 때 완전을 잘못 쳐서 오나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오타가 나버린 표기 오나전을 애용하게 되었다는 거다. 말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훈남훈훈한 남자를 줄인 말이다.

 

신구세대 소통사전은 작년 겨울 글쓴이가 기획해서 만든 작은 책자다. 어느 날 퍼뜩 영감이 떠올라 만든 것은 아니다. 작년 10월에 홍성에 있는 홍성문화원에 한글을 주제로 특강을 하러 갔었는데 강의를 끝마치고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에 어느 어르신께서 젊은이들 하는 말을 통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애들 말을 알기 쉽게 풀이한 용어집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하셨다. 강의가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이라면 대개 강의 내용에 관한 궁금증 같은 것을 질문하는 것이 보통인데 뜻밖의 주문을 받고 잠시 당황했던 기억이 지금도 역력하다.

 

. 만들어 드리겠다고 이 자리에서 바로 답변을 드릴 수는 없지만 한번 궁리해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운전대를 잡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내내 생각했다. 그래 한글 운동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한글이 우리의 보배니, 우리말이 중요하니 어쩌니 하고 잘도 나불거리고 다녔는데 정작 지역에 계시는 어르신들의 고충을 잘 모르고 지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 한번 해 보자.’ 그 길로 다짐하고 한글문화연대의 이건범 위원과 의논했다. 그리하여 신구 세대 간의 소통을 돕는 작은 책자를 하나 만들기로 하였다. 책 만들 돈이 따로 없으니 일단 내용을 만들어서 정 안 되면 프린트를 해서라도 필요한 곳에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나? 경인문화사의 한정희 대표가 이런 얘기를 듣고 책 만드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거들어 주겠다고 해서 제법 번듯한 책이 되어 나왔다. 책이 나오자마자 책을 주문한 어르신이 계시는 홍성문화원에 222권을 보내 드리면서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는지 모른다. 책 나온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으니 아직도 따끈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 같다. 책 내용은 별 거 아니지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니 조금만 소개해 보자.

 

도촬: 당사자의 동의 없이 그 사람의 행동이나 모습을 몰래 촬영하는 일(=몰카). 연관어는 몰래 카메라.

 

(예문)

친구1: 김 영감이 요즘 안 보여?

친구2: 여탕 도촬하다가 감옥 갔대.

 

이밖에도 루저, 레알, 까도남, 듣보잡, 볼매, 불펌, 비덩, 빠순이 등 100 단어 정도의 신조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예문이 담겨 있다. 신구세대 소통사전, 정재환 기획, 한글문화연대 펴냄.

 

글쓴이는 지금 한글문화연대에서 일을 한다. 실은 별로 하는 일이 없지만 공동대표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무늬만 공동대표일 수도 있다. 제대로 하는 일도 없지만 감투를 하나 쓰고 있는 덕에 일감이 떨어지면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더러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다. 아니 개그맨이 어쩌다가 한글 운동을 하게 됐나?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인터뷰 할 때 방송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여러 차례 대답을 한 것 같은데 정말 그랬던 걸까? 방송이라면 어떤 방송이었을까? 개그맨으로 한창 뛸 때는 특별한 자각은 없었던 것도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그를 하면서 이상한 말을 막 해가지고 우리말을 망가뜨리거나 훼손한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혹시 글쓴이가 그랬던 것을 기억하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이라도 알려 주시면 오리발 내밀지 않고 깊이 반성하겠다.

 

곰곰 생각해 보면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지구촌 퀴즈를 진행하면서나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를 하면서 알아서 떠들어야 할 공간이 많으면 많은 만큼 고민도 많았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어떤 젊은 여대생이 친구한테 어머 얘, 너 어쩌면 그렇게 팔뚝이 얇니? 정말 부럽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팔뚝이 얇다고? 아니지 팔뚝은 얇은 게 아니고 가는 거 아냐?’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의 내가 그런 실수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얼굴은 잘 생기셨는데 키가 좀 적으시군요.” 아니다. 키는 적은 게 아니고 작은 거다. ‘정곡을 찔렀다는 말이 있는데 도대체 정곡이란 게 뭘까? ‘사전, 사전 어디 있지?’

 

정곡: 과녁의 한 가운데가 되는 점. ‘목표, 또는 핵심이 되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그래 이런 뜻이었구먼.’ 하나씩 궁금해지고 하나씩 의문을 풀어 나가면서 국어사전과 친해졌던 것 같다. 친해진 건 좋은데 뜻이 알쏭달쏭한 말들이 워낙 많아 국어사전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었던 것도 같다. 여하간 그렇게 우리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사건도 없지는 않았다.

 

서울방송 라디오에서 청소년 대상의 심야 프로그램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진행할 때였다. 그 여고생이 무슨 일로 방송에 출연하러 왔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개 방송 들어가기 전에 서로 인사도 나누고 할 얘기도 점검한다. 인사하고 먼저 이름을 물었다. 여학생의 이름은 표아무개였다. 가르쳐 준 대로 난 그 여학생의 이름을 불렀다. ‘표아무개?’ 그러나 그 여학생은 영문 모를 반응을 보였다.

 

아니요, 표아무개가 아니고요, 표아무개예요.”

그래, 표아무개.”

아니요, 표가 아니고 표라니까요.”

그래, 표아무개!”

 

다음 순간 그 여학생은 체념한 듯한 표정이 되었고,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당시 글쓴이는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방송을 하고 여학생은 출연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뭔가 좀 미심쩍었다. 그 여학생이 왜 자꾸 표가 아니고 표라고 했을까? 뭐가 잘못됐을까?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끝에야 깨달았다. 그 여학생은 표아무개였다. 그런데 나는 펴아무개라고 발음했던 것이다. ‘, 우리나라에 펴 씨가 어디 있나?’ 후회했지만 버스는 이미 떠났다. 그 여학생은 날 얼마나 한심한 놈으로 생각했을까?

 

이 발음 문제는 독자들이 눈으로만 읽고 넘어가서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아무개펴아무개를 소리 내어 발음을 해 보아야 실제 차이를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 개그맨 중에 두 사람의 표씨가 있다. 표인봉과 표영호인데 한번 관찰해 보시라. 이들은 과연 어떻게 발음하는지? 자신들의 성을 정확하게 라고 발음하는지 아니면 ~’라고 발음하는지?

 

- 이 글은 민족21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