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6) 한글을 사랑하십니까?

봄뫼 2012. 11. 12. 17:22

지난 58일 세종대학교에서 언어도 환경이다란 주제로 특강을 했다. 현재 세종대학교에서 세종학을 강의하고 있는 김슬옹 교수가 세종탄신 615(2012. 5. 15)을 맞아 특별히 마련해 준 자리였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남녀 대학생들이 80명 남짓 자리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의식하니 나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긴장이 되었다. 참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 서왔는데 이상하게 늘 긴장이 된다. 긴장하는 게 습관이 된 것도 같다. 애써 웃으며 인사를 했고,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얘기를 시작했다.

 

혹시 언어 환경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들어보신 분, 없습니까? 한 분도 없나요? 그렇지요. 아마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제가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들으실 겁니다. 제가요, 한글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에 언어가 아주 중요한 생활환경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언어 환경이라는 말을 제가 하고 다니는데, 과문한 탓이 아니라면 저 말고 언어 환경을 얘기한 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언어가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연환경, 주거 환경, 교육환경과 마찬가지로 살기에 편안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나무도 없고 풀도 없다면 너무나 삭막하겠지요? 맑은 강물 대신 오물 덩어리가 떠다닌다면 참으로 괴로울 겁니다. 학교나 집 주위에 노래방이나 맥줏집, 모텔 같은 것들이 즐비해도 참 곤란하겠지요. 이렇게 자연환경, 교육환경, 주거환경이 중요하듯이 언어 환경도 중요합니다. 언어 환경이 편안해야 합니다. 언어 환경이 편안하려면 언어가 정확해야 합니다. 듣고 보기 편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것 많습니다. 이상한 말들이 참 많습니다.

 

요즘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욕설입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욕도 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욕도 순기능이 있지만, 일상적으로 습관처럼 하는 욕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고등학생 2명과 중학생 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평균 75초에 한 번꼴, 1시간에 49회의 욕설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욕설의 종류도 다양해서 ×, ×, ×됐다, ×, ×발놈, ×발년 등 성적(性的)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욕설에다가 병신, 새끼, 병신새끼, 돼지새끼, 미친× 등 상대방을 비하하는 욕설, 닥쳐, 뒤져, 처맞을래, 눈깔아 등 상대방을 위협하는 욕설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이렇게 거친 입에 달고 산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상한 존댓말입니다. “손님, 커피 나오셨습니다.” 손님을 의식해서 한 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커피를 존대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이건 간접 존대를 잘못 사용한 겁니다. 간접 존대는 높여야 할 대상의 신체 부분, 성품, 심리, 소유물과 같이 주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을 통하여 주어를 간접적으로 높이는 존대법입니다. 그래서 눈이 크시다’, ‘걱정이 많으시다같은 표현, ‘선생님, 넥타이가 멋있으시네요같은 표현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건 좀 곤란합니다. 여러분이 공원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해야지요.

 

어머, 교수님 나오셨어요?”

그런데 옆에 보니 따님이 있어요.

따님도 나오셨네요.”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간접 존대에 따르면 따님나오셨네요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보니 개가 있어요.

어머, 개도 나오셨네요!”

 

이건 좀 곤란하지요. 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 중요하지만 개까지 존경할 필요는 없을 테고요, 손님을 존중하는 마음은 중요하지만 커피에까지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강의가 꼬박 1시간 걸려 끝나고 학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욕의 순기능은 무엇입니까? 방송사 이름은 한글로 왜 안 하죠? 길거리의 간판이나 문구 등을 통해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어 재미있었습니다. 한글을 자랑스럽게 쓰지 않는 우리나라가 부끄럽습니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데 제일 큰 방해꾼은 누군가요? 한글을 알리기 위해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한글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시간이 없어 모든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마웠다. 그토록 열심히 귀를 기울여준 학생들의 태도가 고마웠고, 한글에 대한 샘솟는 애정이 고마웠다. 이건 아주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외국으로 공부하러 간 한 유학생이 그 곳에서 만난 외국 학생에게 너는 일본말을 쓰느냐, 아니면 중국말을 쓰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우리나라 고유의 한국어를 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외국인이 다소 놀라며 그렇다면 너는 문화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얘기는 좀 이상하다. 우리가 우리 고유의 한국어를 쓰는 것은 맞지만, 그래서 일본어도 중국어도 아닌 우리말 한국어를 쓰고 있지만 고유의 말이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문화인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많은 나라들이 원래 자기들 말을 쓰지 않고 지금도 식민제국의 언어를 공식어로 쓰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프리카나 남미 대륙 오지에 사는 원시 부족들이 그들만의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고유의 언어가 있다는 자체가 문화의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앞의 에피소드는 말이 아닌 글자의 유무를 따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서구인들이 생각할 때 이름도 잘 모르는 동양의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에서 왔다니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말을 쓸 것이라 생각했을 법하고, 당연히 글자도 한자나 가나문자를 쓸 것이라 생각했을 법하다. 그래서 일본글자를 쓰는지 중국글자를 쓰는지를 물었을 터인데, 의외로 우리 고유의 말을 쓰고 있고 글자까지 있다고 하니 놀랐던 것일 게다. 문자가 문명의 바탕임이 분명할 때 고유의 글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문화인, 문명인의 증거다. 만일 한글이 없었다면 미개인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중국의 한자를 쭉 쓰고 있을 것이다. 1945년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가나문자를 쓰고 있을 테고,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한글이 없었다면 로마자를 쓰게 되었을지 모른다. 이것은 고유 문자가 없는 터키가 로마자를 국자로 채용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독립한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이 로마자를 국자로 채택한 사례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고맙게도 한글이 있었다.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이야기는 외국 사람들의 찬사를 소개하는 것이 더 신날 것 같다. 소설 대지를 쓴 미국의 유명한 여류작가 펄 벅은 한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자 가장 훌륭한 글자라 했고,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극찬하였다. 일본 도쿄외국어대학의 우메다 히로유키 교수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소문자라고 했다. 영국 리스대학의 제프리 샘슨 교수는 한글이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독특하지만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계열의 글자를 파생해내는 방법(--)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훌륭하다고 극찬하였다. 샘슨 교수의 이러한 분류방법은 세계최초의 일이며 한글이 세계 유일의 자질문자로서 가장 우수한 문자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멋진 한글을 우리는 정말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일까? 길거리 간판에는 왠지 한글보다 영어가 더 많아 보인다. 24시간 편의점에서 큰 회사 이름까지 영어로 쓴 것이 많고,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이름도 영어로 쓴다. 한글은 어디로 갔을까? 문득 몇 년 전 대학로에서 동주민센터 명칭 반대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를 방문한 한 중국인이 한 말이 생각난다.

 

당신들이 정말로 한글을 사랑합니까?”

 

- 이글은 민족21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