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지독한 감기를 앓는 바람에 눈앞에 책을 두고서도 책장을 넘기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읽었다. 김동우, 뭉우리돌의 들녘
김 작가를 만난 것은 지난여름 국외 사적지 답사 때였다. 인천공항에서 처음 만난 김 작가는 젊고 미남이었고 말소리는 또렷했고 성격은 소탈했으며, 대련에서 용정, 봉오동, 하얼빈 등을 답사하며 역사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을 때는 신중했고 열정적이었다.
독립 운동의 현장을 찍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횡단하며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는 이유는 그가 역사는 기억되어야 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록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뭉우리돌의 들녘에는 러시아와 네덜란드에서 투쟁한 독립 운동가들의 이야기가 혼신을 다해 찍은 사진과 함께 담겨 있다.
380쪽에 이르는 제법 두꺼운 책이지만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읽어야 할 글의 양이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연해주 한인 이주사를 시작으로 안중근, 최재형, 엄인섭, 15만 원 탈취 의거의 주역 철혈광복단, 한인 최초 볼셰비키 혁명가인 김알렉산드라 등등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점에서 뭉우리돌의 들녘은 독립 운동사를 복원하면서 현재와 과거를 잇는 특별한 사진집이자 역사서다.
표지를 장식한 사진은 연해주 독립 운동의 대부이자 한인들의 페치카였던 최재형이 살던 집이다.
“정직한 정면 구도였다. 이는 객관적 사실을 체현하려는 의도다. 반면 색감은 어딘가 모르게 바랜 것 같고 전체적 밝기는 은은함이 지배했다. 특히 장노출을 이용한 구름의 이동이 과하지 않게 표현된 게 특징인데, 쪽빛 하늘은 알 듯 모를 듯한 헐레이션(Halation) 효과로 몽환 기운을 풍겼다. 사진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조짐이나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여운처럼 다가온다... 바람과 구름,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옅은 빛은 사명을 다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의미의 전환을 이룬다.” (261~262쪽)
1911년 1월 26일 초대 러시아 공사 이범진이 천장에 목을 매 자결했다. 나라가 없어졌으니, 더 이상 대한제국의 공사도 아니고, 더 이상 할 일도 없다. 어쩌면 나라가 망한 데 대한 책임을 진 것일 수도 있다. 이범진은 죽기 전 모든 재산을 정리해 연해주 독립 운동가들에게 보냈다.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다가 186쪽에 실린 사진에 눈길이 머물렀다. 이범진이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느 거리인 것 같은데, 사진이 뒤집힌 것 같았다. 양쪽으로 건물이 늘어선 거리에 비둘기(?)가 하늘을 밟고 거꾸로 앉아 있다. 뭐지? 책을 180° 돌려 보니, 길 위에 앉은 비둘기가 보였다. 그 순간 하늘을 밟고 앉은 비둘기가 혹시 천장에 목을 맨 이범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잠깐 동안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건 나중에 김 작가한테 꼭 물어봐야겠다.
#뭉우리돌의들녘 #김동우 #수오서재
'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산시 은계동, 낙상-골절-수술 (0) | 2024.11.14 |
---|---|
영어 공부하는 분들에게 소개합니다, Episoden. (2) | 2024.05.10 |
책과 함께! 우리말 비타민 (0) | 2023.10.21 |
파란토크 (1) | 2023.10.13 |
뜨거우면 지상렬 (0) | 2023.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