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에 잠시 라디오 대본을 집필했다. 방송은 오후 2시이지만 '재미있는 말'을 준비하기 위해 아침 6시에 일어나 신문을 읽으며 대본을 구상했다. 그런데 한번은 대본에 '싸가지'와 '쪽팔리다'를 넣었다가 담당 피디(PD)에게 방송에 부적합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미 널리 쓰고 있는 말이 아니냐고 대꾸했지만 돌아온 답은 방송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가려야 한다는 경고에 가까운 훈시였다. 결국 두 단어는 다른 단어들로 대체됐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방송에서 이들 두 단어는 금기어(禁忌語)였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건전한 방송언어의 발전을 위해 불건전한 '잡어(雜語)'들의 도발과 침투를 막는다는 심의와 규제의 그물코를 시나브로 통과해 안방극장에 상륙했다. 그리하여 품위 있었던 방송 언어는 '싸가지 없고 쪽팔리는' 언어로 전락했다. 이게 벌써 10여 년 전 얘기니 온갖 정체불명의 말들이 방송에 난무하는 요즘 시대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타박하는 분도 있을지 모른다.
요즘 방송을 보면 막말이 도를 넘었음은 분명하다. '막'은 거친, 함부로, 마구, 마지막 등의 뜻을 가진 접두사이다. '막말'은 거친 말이고, 함부로 마구 한 말이고, 마지막까지 간 말이다. 방송 언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중하게 선택돼야 하는데 너무 거칠고 상스럽고 기괴하고 폭력적이다. 우리 사회의 언어 지표인 방송 언어가 막말로 인해 건전함과 기품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방송 언어에 대한 뜨뜻미지근한 심의나 주의가 아니라 강력한 규제의 필요를 제기하고, 막말 연예인을 퇴출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방송 언어 교육에서 일정한 점수를 딴 사람만 출연시키거나,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지적을 받을 경우 방송 출연을 금지시키는 '삼진아웃제'도 거론된다. 물론 막말 방송의 폐해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것이지만 막말 방송에 대한 책임을 일부 연예인에게만 돌리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 같다.
막말은 생방송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녹화 방송에서도 많이 나온다. 녹화 방송은 방송을 내기 전에 편집을 한다. 좋은 장면은 살리고 좋지 않은 장면은 잘라낸다. 좋은 말은 살리고 좋지 않은 말은 잘라내는 기준으로 편집이 이루어진다면 막말은 시청자들의 귀에까지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막말이 방송에 나온다면 그것은 그 막말이 방송에 나가도 좋다는 방송 종사자들의 동의를 얻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막말에 대한 책임은 발언 당사자인 출연자뿐 아니라 담당 피디와 작가가 함께 져야 한다. 담당 피디와 작가가 막말은 방송에 안 된다는 확고한 원칙이 있다면 막말 방송은 사라질 것이다. 생방송 때 출연자가 갑자기 막말을 쏟아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현상 역시 방송 종사자들 전반에 퍼져 있는 언어적 해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방송 언어와 비방송 언어의 관계는 공식어와 비공식어, 표준어와 방언, 교육 언어와 비교육 언어의 관계와 같다. 표준어와 교육 언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듯 방송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우선 방송 종사자들은 방송 언어가 한낱 개인의 말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늘 자신의 언어를 돌아보고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한다. 또 국민도 방송 언어에 끊임없이 애정을 갖고 충고해야 한다.
- 이 글은 2011년 2월 19일자 조선일보 [시론]에 실렸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18/20110218021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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