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어느 날, 같이 방송에 나가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개그듀엣 ‘동시상영’을 만들었다. 개그와 개그송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팀이란 의미였다. 게다가 우리는 키도 182로 같았고 몸무게도 비슷했고 발 크기마저 같아 외관상으로도 동시상영이었다.
그날부터 방송에 나가 떠들 개그를 구상하고 노래 연습을 하면 며칠을 분주히 보냈다. 노래는 친구가 속해 있던 밴드 ‘악어들’의 히트곡이었던 ‘악어 사냥’, ‘양보 송’과 내가 만든 ‘혹성탈출’, ‘23글자’ 그리고 친구의 창작곡이었던 ‘도깨비불’ 정도로 하고 점차 레퍼토리를 늘려 나가기로 했다.
며칠 후 이수만 씨가 디제이를 보고 있던 엠비시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에 첫 출연했다. 생방송이었는지 녹음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십중팔구는 생방송이었을 텐데 그래도 떨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23글자는 어떤 노래인가요?”
“원래 제목은 좀 길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뒤의 그 아픔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이게 원래 제목인데 저희들이야 괜찮지만 이수만 씨가 고생하실 것 같아 ‘23글자’로 줄인 거죠,”
떨지 않은 이유는 담력이 세서라든가 시쳇말로 깡이 좋아서가 아니라 방송국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방송 경력 30년이 되는 요즘에도 카메라와 대중들 앞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긴장하는 모습과 비교해 보면 그때 일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여하간 애들이 재밌다, 노래도 특이하고 웃긴다는 평을 들으며 여기저기 라디오 프로그램에 불려 다녔고, 텔레비전에도 진출해 케이비에스의 ‘젊음의 행진’, 엠비시의 ‘영11’ 등에 출연했다. 그때는 두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엄청 높았던 때라 방송이 나간 다음 날 종로에 나가면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쟤네들 어제 텔레비전에 나온 애들 아니니?”
“그래 맞다. 둘 다 키도 크고 괜찮은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갔을 것이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도 대중들의 눈길이 주는 달콤함을 맛본 것도 그때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머지않아 스타가 될 거라는 턱없는 환상에 빠졌다. ‘그래, 한 3개월 열심히 하면 유명한 스타가 될 거야.’ 그러나 그건 꿈이었고, 3개월은 너무 짧았다.
1983년 가을부터 엠비시 ‘영11’에 고정출연하면서 개그맨의 길을 걸었지만 여전히 무명이었고, 앞길도 순탄치 않았다. ‘청춘만만세’에도 출연해 콩트 연기도 했지만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연기가 카메라 앞에 선다고 저절로 될 리 없었다. 한없이 부족했고 늘 초조했다. 스타니 슬래브스키의 ?배우수업?을 교과서 삼아 연습도 하고, 서양의 희극론과 우리나라의 고전 해학에 관한 책들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당시 난다하는 콩트 작가들의 작품도 죄다 섭렵했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유머집까지 몽땅 독파했다.
방송 녹화를 앞두고 매주 한 번씩 열리는 아이디어회의는 재밌고 즐겁기도 했지만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기도 했다.
“전깃줄에 참새가 10마리 앉아 있는데요, 포수가 총을 빵 하고 쐈습니다. 어떤 참새가 맞아 죽었을까요?”
“어떤 참새가 죽었는데?”
“네. 맨 뒤에 있던 참새가 누가 죽었나 하고 내다보다가 포수가 쏜 총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 그거 다 아는 얘기 아냐?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좀 참신한 거 좀 얘기해 봐.”
아이디어회의는 물론 연습과 녹화에 이르기까지 방송국에서의 생활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몸은 쉽사리 풀리지 않고 기회도 좀처럼 오지 않은 채 황금 같은 청춘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갑자기 친구가 개그맨 생활을 접고 코미디 작가로 전업을 했다. 전혀 상상치 못한 일이라 충격이 컸고, 얼마 후 나도 방송을 쉬게 되었다.
1년쯤 쉬고 다시 방송국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바로 복귀할 수 없었다. 그만두는 거야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지만 복귀는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 복귀를 환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축구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신발 끈만 매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로 스타덤에 오른 이문세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별밤에 와서 방송 일을 도우라는 거였다.
날마다 오후 1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방송국에 있는 도서관에서 ‘별밤극장’ 대본에 쓸 자료를 찾았고, 밤에는 별밤 사무실에서 방송 일을 돕고 심부름도 했다. 내가 방송에 직접 출연하는 것은 일주일에 딱 한 번이었다. 당시 라디오 방송 1회 출연료가 18,000원이었으니까 한 달 수입은 72,000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러다가 별밤 공개방송에도 출연했다. 어느 때부턴가 “이번에 나오실 분은 ‘별밤극장’의 정재환 씨입니다.”라는 소개와 함께 무대로 나가면 박수와 ‘오빠’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일반인들은 ‘정재환이 누구야’ 했지만 별밤 애청자들에게 난 더 이상 무명 개그맨도 낯선 연기자도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얼굴이 짧은 개그맨, 개그계의 아랑드롱 정재환입니다.”라는 인사는 차마 하기 쑥스러운 것이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잘생겼네, 키 크네, 목소리 좋네, 엉뚱하네, 싱겁네, 웃기네, 대본 잘 쓰네, 노래도 좀 하네, 성실하네 같은 말을 들으면 힘이 났다.
그렇게 1년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밖에서는 여전히 무명이었고 얼굴 없는 개그맨이었다. 텔레비전에 나가야 한다! 마침 이택림 형이 청춘만만세를 담당하고 있던 신종인 피디에게 나를 적극 추천했고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복귀가 결정되었다.
아이디어회의 때는 퇴짜를 맞더라도 열심히 떠들고 카메라 앞에서는 대사 한 마디 없는 단역 주제에도 정말 열심히 연기했다. 그러다가 ‘비사벌 아사녀’란 콩트에 당시 잘 나가던 김보화 씨의 상대역인 아사달로 출연했는데 반응이 좋았고, 어느 덧 대본도 혼자 작성할 정도로 실력이 축적돼 있었다. 그러고 보면 별밤에서의 1년 반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방송계를 떠나 지금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김은태와 함께 한 ‘구르몽과 시몬’도 히트작이었고, ‘젊음은 가득히’라는 청소년 탐방 프로그램은 내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무대였다. 그러다가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전도협(전국도둑놈협의회)에 출연해서 구봉서 선생님과도 함께 연기했다.
“자, 어떻게 하면 이 문화은행을 털 수 있을지 한번 얘기들 해 봐.”
“(축구공을 들고 일어선다)네. 그러니까 우선 이 축구공을 은행에다 던져 넣은 다음, 들어가서 들키면 공 찾으러 왔다고 얘기하고 안 들키면 터는 겁니다.”
“그게 뭐야? 앉아!”
매주 똑같은 대사였다. 문화재벌 김 회장집을 털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우선 공을 던져 넣은 다음, 들어가서 들키면 공 찾으러 왔다고 하고 안 들키면 터는 겁니다. 매주 똑같은 대사였지만 내 존재감은 서서히 높아갔고(?) 드디어 내 청춘의 황금기를 열어 줄 운명의 프로그램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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