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8) 한글문화연대를 만들다

봄뫼 2012. 11. 12. 17:25

1999년 봄에 ?자장면이 맞아요, 잠봉은?을 냈는데, 여름에 춘천에서 전화가 왔다. 한림대학교의 김영명 교수가 책을 재미있게 봤다며 조그만 책자를 만드는데 글을 인용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왕 쓰시는 김에 왕창 쓰시라고 했는데 얼마 후에 진짜로 ?한글과 문화?라는 조그만 책자가 왔다. 김영명 교수를 비롯한 여러 분의 우리말 사랑과 함께 ?자장면과 우리말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글쓴이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또 책을 잘 받았다는 감사의 편지를 띄웠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가칭 한글문화지식인연대라는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데 참여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정재환 씨 생각이나 제 생각이나 똑같은 것 같은데 같이 해 봅시다. 학계 쪽으로는 제가 사람을 모아 볼 테니 방송 쪽으로 사람들을 모아 주세요.”

 

내년부터 학교도 다녀야 하고 방송 일도 더 열심히 해야 되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별로 없을 텐데 과연 할 수 있을까? 한동안 고민을 했지만 모든 것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방송을 같이 하면서 친하게 된 김수용과 임성민 아나운서를 포섭하고 서울방송 전문MC 출신인 지석진에게도 전화를 했다.

 

석진아, 이런 모임을 하려고 하는데 너 같이 안 할래?”

할게요.”

 

나중에 알고 보니 지석진은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란다. 그래서 보험도 이것저것 구색 맞춰 다 들고, 장사꾼이 좋다(?)는 물건은 다 사고, 물론 정말 좋은 물건이라 믿어서가 아니라 물건 파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다. 그래서 의향을 묻자마자 대뜸 할게요라고 대답한 건가? 여하튼 그날 이후로 한사람 두 사람 회원을 확보했다.

 

19991217. 종로에 있는 기독청년회 호텔 소연회실에서 가칭 한글문화지식인연대’ 1차 준비모임을 가졌다. 그 날 시네마 데이트녹화를 마치고 이동우와 함께 퇴근 무렵의 복잡한 길을 달렸다. 워낙 녹화가 늦게 끝나서 출발이 늦은 터라 약속시간에는 늦었지만 고상두, 김영명, 김웅진, 김주성, 김진희, 박광희, 신영철 님을 만날 수 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왠지 남 같지 않았다. 이 넓은 세상,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소중한 사람들, 그래서 그 생경한 얼굴들이 친근하게 느껴진 것 같다. 약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회의에서 우선 인터넷을 통해 한글문화운동을 해나간다는 것과 학술운동과 시민운동을 병행해나가기로 가닥을 잡고 2000222일로 창립대회 날짜를 정했다.

 

그 날 만큼은 다들 모이자고 굳게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바로 전 주에 이동우 회원이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인천방송 부근에 있는 고가도로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는데 뒤에서 달려오던 트럭이 미처(미쳐?) 서지 못해 이동우 회원의 차를 덮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아니 사람이 살아있네하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창립대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는데 김용만 회원에게 전화가 왔다. 허리디스크가 도져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 도저히 참석을 할 수가 없다고, 정말 죄송하다며 말끝을 흐렸다. 어쩌랴? 괜찮으니 염려 말고 수술 잘 하라고 격려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2000222일 창립대회 당일이 되었다. 시작은 오후 3. 연세대학교 알렌관에 2시가 조금 넘으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다. 김영명 교수도 오고 고상두 박사도 오고 리의도 교수, 신형철 교수, 김주성 교수, 김웅진 교수, 정신문화연구원의 정용화 박사, 한글학회 성기지 책임연구원, 축사를 해주기로 약속한 한글학회 허 웅 회장님, 이계진 선생, 사회를 보기로 한 임성민 아나운서, 그리고 김수용, 지석진, 방송작가 김은영. 이밖에도 얼굴과 이름을 일일이 다 알 수 없는 많은 분들이 대회장을 찾아 주셨다. 게다가 한글문화연대의 발족을 알려 줄 한국방송공사의 카메라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류시현 회원이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류시현 회원, 창립대회 전전날 방송 프로그램 쫑파티를 하면서 주위의 강권에 못 이겨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마시고 토하고 또 토하며 졸도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는 거다. 세상에 여자한테 웬 술을 그리 마시게 하는지.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토할 때 누가 등이나 두들겨줬는지,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결국 졸지에 교통사고를 당한 이동우, 허리 수술을 받은 김용만, 술병이 난 류시현 회원이 참석하지 못한 채 창립대회를 치렀다. 말씀 드린 것처럼 몇몇 회원들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두 번 다시는 없을 창립대회에 참석을 못했으나, 그런 주위의 방해공작(?)과 난관을 헤치고 두 시간에 걸쳐 창립대회와 세미나를 가졌다. 한림대학교의 김영명 교수를 대표로 뽑고 김주성 교수와 글쓴이가 부대표가 되었다. 한글문화연대가 앞으로 해나갈 일들과 한글과 한국어 발전에 대한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돌이켜 보건대 그날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사진을 찍기로 한 한림대학교 학생 기자가 30분이나 늦게 도착해서 준비위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가슴을 졸이며 한참을 기다리는데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벌써부터 와있었는데 잠깐 자리를 비웠었단다. 잠깐인지 영원인지? 게다가 취재를 약속한 인천방송에서는 전날 회식을 하며 다들 꿩고기를 삶아 먹었는지 카메라를 보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창립대회 동영상 자료 하나 남기지 못했다. 방송사 카메라만 믿고 예산을 줄인다며 비디오 촬영을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식, 아기돌잔치, 유치원 재롱잔치, 지하철 막말녀 등등 동영상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적인(?) 한글문화연대 창립대회 동영상이 없다니…….

 

4월에는 춘천에서 운영위원 모임을 가졌는데 서울에서 김웅진, 김은영, 김지희, 성기지, 고상두, 임성민 님 등이 만나 글쓴이의 처남에게 빌린 9인승 승합차를 몰고 경춘가도를 달려갔다. 회의 장소는 한림대학교 사회과학관 5. 춘천에서는 김영명, 고경희(시인), 박광희, 신형철 님이 참석했다. 회의 끝나고 먼 길 달려 왔다고 춘천에서 유명한 흑두부 집에 데려가서 맛있는 거 많이 사주셨다. 그런데 정작 유명한 흑두부는 못 먹었다. 저녁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동이 나버렸다. , 흑두부의 꿈이여. 서울에서 흑두부 먹으러 춘천 가시는 분들은 꼭 미리 예약하시기 바람.

 

그로부터 10여 년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한글문화연대에도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사단법인으로 인가도 받았지만, 한글문화연대의 시작은 비영리 시민단체였다. 지금도 그 정신은 그대로다. 그리고 작지만 강한 단체로 성장했다. 오로지 한글과 한국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 쌈짓돈을 털어 누리집도 만들고 회지도 발간하고 해마다 한글날에는 기념행사도 열고 있다. 창립대회와 함께 문을 연 누리집을 통해 가입한 회원들이 수천을 헤아리지만 아쉽게도 회비를 내주시는 정회원은 현재 350분 정도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고마운 분들!

 

한글문화연대 회원은 누리집을 통해서 활동하므로 누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때때로 큰일이 있을 땐 만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는 학교라든가 직장이라든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자유롭게 활동한다. 특별히 지켜야 할 규약은 없지만, 풍속을 해치는 일을 벌이거나 지하철에서 막말을 하거나 해서 물의를 빚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말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한글과 한국어 발전을 위해서 회비를 내주시는 분들과 모든 회원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우리는 핏줄을 나눈 가족은 아니지만 뜻을 같이 하는 가족이다. 부모 형제는 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부모나 형제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친구를 사귀고 학교나 직장을 선택하는 일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만일 한글과 한국어를 사랑하는 분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한글문화연대와 소중한 인연을 맺어 주시길! 한글문화연대 누리집 주소는 www.urimal.org이다.

 

 

- 이 글은 민족21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