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홍대 카페 골목 쪽으로 산책을 나간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목적 없이 터벅터벅 길을 걷는 게 즐겁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거리 풍경도 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구경도 한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지는 식당이나 커피숍 간판을 사진 찍듯이 바라보다 보면 실로 다양한 언어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한글과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인도어 등등 온갖 나라말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요즘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일본어다.
과거에는 일본 음식을 파는 식당하면 회나 초밥을 파는 일식집과 일본식 꼬치요리를 파는 선술집 정도가 다였지만, 몇 년 사이에 매우 다양해지고 수적으로도 급증했다.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가 등장한 것은 벌써 20년은 된 것 같고, 최근에는 일본 라면인 ‘라멘’을 파는 식당, 일본 식 덮밥인 ‘돈부리’를 파는 식당, 일본식 도시락인 ‘벤또’를 파는 식당, 일본식 튀김인 ‘덴부라’를 파는 식당, 일본식 빈대떡인 ‘오코노미야끼’를 파는 식당, 원조 짬뽕이라고 할 수 있는 나가사키 ‘참퐁’을 파는 식당 등등 없는 게 없다.
이런 간판들과 그 간판 아래 길게 줄지어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세상이 참 많이 변했음을 느낀다. 나 역시 빈대떡집 앞에서 줄을 서기도 했지만…….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지만 심정적으로는 가장 먼 나라이기도 하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떠올리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직도 강제 징용자들에 대한 임금 체불 문제,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던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독도에 대한 도발에 직면하게 되면 한마디로 뚜껑이 열리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일본의 음식이, 일본의 영화가, 일본의 노래가, 일본의 드라마가 대한민국의 한복판을 파고드는 것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묘한 현상이다. 물론 결을 달리해서 보는 게 좋다. 사과 안 하니까 너희들하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자세는 자칫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킬지도 모른다. 불편해도 감정이 풀어진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해도 서로 만나면서 인내와 끈기를 갖고 끊임없이 대화를 해나가는 게 두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좋을 것이다.
그런데 짬뽕은 왜 일본 식당이 아닌 중국집에서 파는 걸까? 어렸을 때는 짬뽕이 중국 음식인 줄 알았다. 당연히 말도 중국말인 줄 알았다. 헌데 아니었다. 우동도 일본말이고 짬뽕도 일본말이었다. 우동의 유래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본디 ‘짬뽕’은 일본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이 먹던 ‘초마면(炒碼麵)’이라는 국수가 현지화된 것이라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세기 말 일본 규슈 나가사키에 살던 진헤이준이라는 중국인이 동포 고학생들이 배곯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끝에 인근 화교 식당에서 쓰다 버린 닭이나 돼지 뼈, 푸성귀를 모아 국수를 만들어 끓여준 것이 짬뽕의 시작이었다는 설도 있다.
진헤이준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여하간 중국인들이 먹던 국수가 일본에 가서 ‘참퐁’이 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면 왜 참퐁인가? 일본말 참퐁은 ‘종류가 다른 것을 한데 섞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나가사키에 와서 사는 중국인들이 먹는 국수를 보니 여러 가지 재료가 섞여있어서 ‘참퐁’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국인들이 먹던 초마면은 일본의 참퐁으로 거듭 태어났다. 바로 이 참퐁이 우리나라에 와서 ‘짬뽕’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것은 경음화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요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된소리를 많이 낸다. 가짜를 ‘까짜’라고 하거나, 그릇을 그냥 부드럽게 닦으면 되는데 아주 ‘쎄’게 박박 ‘딲’는다. 매운 것은 고추가 아니고 ‘꼬’추다. 머리를 자르지 않고 ‘짜’르거나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경우에도 잘렸다고 하지 않고 ‘짤’렸다고 한다. 좀 세게 아니 ‘쫌 쎄게’ 말해야 속이 시원하고 말 좀 했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런 관계로 일본말 참퐁이 짬뽕이 되었을 것이다. 이건 일본말 ‘만탕’을 ‘만땅’이라고 하거나 ‘팡쿠’을 ‘빵꾸’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팡쿠는 본디 영어 ‘puncture’이다. 그러니까 본디 발음은 ‘펑처’ 정도일 텐데, 일본 사람들이 뒷부분을 맘대로 떼어버리고 ‘punc’까지만 발음해서 ‘팡쿠’라고 했을 것이다. 아, 만탕은 ‘滿+tank’이다.
얼마 전 1930년대에 나온 잡지를 읽다가 ‘팡’이라는 표기를 발견하고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게 지금의 ‘빵’이라는 걸 깨닫고는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빵을 ‘팡’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빵 역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 같은데, 초기에는 일본 사람들처럼 우리도 ‘팡’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여기 또 힘이 들어가서 ‘빵’이 된 것이다. 어디까지나 글쓴이의 추측이긴 하지만 십중팔구일 것이다. 좌우지간 우리나라에만 오면 뭐든지 ‘쎄’진다. 버스가 ‘뻐쓰’가 되고 가스가 ‘까쓰’가 되듯이.
이 경음화에 대해서는 좋지 않다고 지적한 분들이 많았다. 발음이 ‘쎄’지고 돼지면 성정이 거칠어진다든가 뭐 그런 말씀을 하신 분도 있었다. 반드시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 이런 문제를 얘기하고 싶다. ‘까짜’, ‘딲다’, ‘꼬추’, ‘뻐쓰’, ‘짜르다’, ‘까쓰’라고 할 거면 애당초 가짜, 닦다, 고추, 자르다, 버스, 가스 등의 ‘가’, ‘닦’, ‘고’, ‘자’, ‘버’, ‘가’ 같은 글자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 나온 김에 확 없애버릴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나가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세종대왕님께 허락도 얻어야 할 테고. 안타까운 것은 지나친 경음화 현상에 휩쓸려 점점 글자와 소리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언문일치가 되지 않는다. ‘가’라고 쓰고 ‘가’라고 소리 내는 것이 우리 한글의 장점인데도 말이다.
다시 짬뽕으로 돌아가 보자. 아니 ‘참퐁’이다. 일본인들은 중국의 초마면을 자기네 음식으로 재창조하면서 이름도 일본화 했다. 그래서 참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참퐁을 그냥 ‘쎄’게 발음했을 뿐이다. 아쉽다. 그래서 한 때 글쓴이는 ‘짬뽕’의 이름을 우리말로 바꾸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졸저 ?우리말은 우리의 밥이다? 147쪽). 국물 맛이 얼큰하니까 ‘얼큰면’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문제는 이게 사람들에게 널리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반가웠던 것은 어느 방송에서 실험을 했는데,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얼큰면 2그릇 갖다 주세요.”라고 했더니 짬뽕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조금만 널리 알려졌다면 ‘얼큰면’으로 환골탈태할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사실 초밥이나 회라는 말도 원래는 일본말 ‘스시’와 ‘사시미’를 해방 후에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글쓴이가 어렸을 때에는 와리바시, 다마네기, 닌징, 빠께쓰, 쓰루메, 쓰리, 쓰메끼리 같은 말들을 예사로 썼다. 속도는 더뎠지만 그래도 우리말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들이 있어 나무젓가락, 양파, 당근, 양동이, 마른 오징어, 소매치기, 손톱깎이로 바뀌었다. ‘다꾸앙’이 단무지로 바뀐 것은 정말 오래되지 않았다. 글쓴이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1980년대까지도 줄기차게 ‘다꾸앙’을 먹다가 1990년대 중반 들어서서 어렵사리 바뀌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라, 와사비, 이빠이 같은 말들은 여전히 일본말 그대로 쓰고 있다. 마음먹기 따라서 접시, 고추냉이, 많이 혹은 가득 같은 말들로 얼마든지 바꾸어 쓸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언급한 돈부리, 오코노미야끼, 덴부라, 벤또 같은 식당 간판을 몽땅 일식 덮밥, 일식 빈대떡, 일식 튀김, 일식 도시락으로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요즘 일본인들은 한류와 한류 스타에만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김치, 불고기, 갈비, 막걸리 같은 우리 음식과 우리 술에도 환호를 보낸다. 이름도 우리말 그대로 쓰고 있다. 지금은 일제강점기와 같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다. 한일 양국이 대등하게 교류하고 있고, 여러 방면에서 자연스런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말이 건너가기도 하고 일본말이 건너오기도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우리가 우리말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우리말을 존중해 주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민족21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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