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강습소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서 독립지사들은 서간도지역을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 했다. 그 일환으로 1911년 5월경 류허현(柳河縣) 싼위한 푸(三源浦) 추가가(鄒家街)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회의를 개최하고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경학사의 첫 번째 사업은 무관학교의 설립이었다.
이회영(李會榮)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이장녕(李章寧)·이관직(李觀稙) 등 대한제 국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의 무관과 함께 추가가에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1911년 6월 토착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시작된 신흥강습소는 신민회(新民會)의 ‘신’자와 다시 일어 나는 구국투쟁이라는 의미의 ‘흥(興)’자를 합한 것으로 나라를 새로 일어나게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초기 신흥강습소의 학생은 약 40여 명이었다. 추가가 신흥강습소 교장은 이철영과 이동녕 (李東寧)이었으며, 본과 또는 원반과 군사학을 전수하는 특별반으로 나누어졌다. 신흥강습 소는 이회영 6형제와 안동의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을 비롯한 명망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들은 사회지도층으로서 기존의 모든 기득권과 영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바쳐 신흥강습소를 설립한 것이다.
신흥강습소는 국내의 식민교육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특히 역사과목의 강의록은 교사들이 직접 편찬하였다. 그 내용은 사회발전의 규율, 제국주의국가의 한국침략사 등이 주를 이루 었다. 또한, 독립운동의 형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사 과목이 중요시되었고, 중세 사와 고대사 등도 가르쳤다. 학교의 학풍과 분위기는 비교적 엄격한 편이었다. 숙식은 학교 기숙사에서 해결하였으며, 학생들의 교육열 또한 높았다.
싼위한푸 추가가는 길게 자리 잡은 비교적 큰 마을이다. 추가가라는 이정표에서 대고산 쪽으로 오르면 왼편에 기와파편을 분쇄하는 공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해방 이후 조선족학교가 있었던 장소이다. 이 학교 주변에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신흥강습소 학생과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샘물터는 신흥강습소 추정지에서 북쪽으로 1.8㎞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지금도 석축 일부가 남아 있으며, 우물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샘물 정도 크기의 못이 남아 있다. 원래 식수로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인근 농가에서 농약병을 씻는 등 주변이 오염되어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 민족문제연구소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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