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대화

광주와 너른골

봄뫼 2020. 3. 9. 21:35

  하광뉴스 2020년 3월 8일자에 실린 시인 전홍섭의 글 '동일 지명 장․단음과 순우리말로 구분하자'를 읽고,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목에 드러나듯이 같은 이름을 가진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 장단음으로 구분하든가 순우리말을 쓰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동명이인이 있는 것처럼 동명이처가 있지요. 경기도 광주와 전라도 광주도 그런 곳입니다. 한자로는 광주(廣州)와 광주(光州)로 구분되지만, 한글로만 적고 발음할 때는 쉽사리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경기도 광주, 전라도 광주라 하면 되지만, 매번 경기도와 전라도를 붙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가능하면 짧게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전홍섭 시인이 제시한 해법은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장단음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어문각에서 편찬한「표준 한국어발음대사전」을 보면 〔광주 光州〕는 짧게,〔광ː주 廣州〕는 길게 발음하도록 되어 있다.
그 표시는 장음부호(ː)를 달거나 음절 위에 선을 그어 표기한다. 원래 언어의 근본은 글말(문자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말(음성언어)에 있다.
표준어를 제정함에 있어 낱말들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맞춤법 못지않게 어떻게 발음하느냐 하는 표준발음법도 매우 중요하다.
http://www.hg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2774


  맞춤법 못지않게 어떻게 발음하느냐 하는 표준발음법도 매우 중요하니, 장음인 경우 장음부호(:)를 달거나 음절 위에 선을 그어 표시하자고 합니다. 한글로 '광주'라 표기되는 두 도시의 경우라면 '광:주'라고 했을 때, 전라도 '광주'와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발음할 때는 장음부호에 따라 '광'을 길게 발음하면 됩니다.
  장단을 정확히 하면 동명이처를 구분하는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실행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장단 구분이 어렵다는 겁니다. 달리는 말은 '짧게, 언어를 뜻할 때는 '길게' 말이라고 합니다. "눈에 눈이 들어가니 눈물인가, 눈물인가?"라는 문장에서 신체의 일부인 '눈'은 짧게, 추울 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길게 발음합니다.
  말과 눈 말고도 이러한 예는 부지기수입니다. '살'을 길게 발음하는 ‘살 맛 나는 세상’은 '살다'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살'을 짧게 발음하면 '고기'를 뜻하므로 끼니마다 육식을 하지 않는다면 '살'을 길게 발음해서 ‘살: 맛 나는 세상’이라고 발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짧게 ‘살 맛 나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육식을 많이 하는 세상이긴 합니다만, 이유는 뭐가 장음이고 뭐가 단음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른다기보다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거나 아무 생각이 없다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일 것 같습니다.
  여하간 장단음의 차이를 모르거나, 안다 하더라도 정확히 기억하고 구분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장단음이 구분되고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어렵고, 시간이 갈수록 길고 짧은 소리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무디어질 것입니다. 장단음의 구분은 원칙과 이상으로는 옳지만 비현실적입니다. 어쩌면 아나운서 지망생들도 장단음 연습을 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전 시인이 제안한 다른 해법은 순우리말 이름을 쓰자는 겁니다.


광주(光州는‘빛고을’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많이 쓰고 있다. 이에 대해〔광ː주廣州〕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다.
광주(廣州)는 원래 너른 땅이었다. 삼국시대에는‘위례성’으로 376년 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고려 이후 광주 목(牧)이었다가 조선 선조 때에는 23개 면을 다스리는 부(府)로 승격되기도 했다.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 그리고 서울의 송파, 강동구와 강남구의 일부가 모두 광주 땅이었다. 그러니 순우리말 지명인‘너른골’이라는 이름이 실감이 난다.

  두 말할 나위 없이 '빛고을'에는 익숙합니다. '한밭'이라고 하면 쉽사리 '대전'을 연상합니다.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옛 이름입니다. 한자를 사용하기 전에는 이렇게 우리말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서울의 행촌동은 은행나뭇골, 평창동은 밤나뭇골, 신촌은 새말, 북가좌동과 남가좌동은 가재울, 연지동은 연못골이었습니다.

  본디 그 땅의 특성에 따라 우리말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한자로 표기하게 됨으로써 옛 이름을 쓰지 않게 된 것입니다. 특히 일제 때 이런 식의 개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2019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한글문화연대에서 '서울의 토박이말 땅이름'이라는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글문화연대 누리집과 다음카페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글문화연대 https://www.urimal.org/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http://cafe.daum.net/name0900


  전 시인은 전라도 광주를 빛고을이고 하듯이 경기도 광주는 '너른골'이라고 하자는 겁니다. '너른골'이 경기도 광주라는 것을 알리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행정 명보다는 지하철 역명이나 톨게이트 명칭, 또는 지역축제 등의 브랜드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처음에는 좀 어색하더라도 자꾸 쓰다 보면 익숙해지고 정겨운 우리말 지명으로 정착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인터넷에서 빛고을을 검색하면 빛고을전남대병원, 빛고을대로, 빛고을농촌테마공원, 빛고을고등학교, 빛고을노인복지재단, 빛고을교회, 빛고을관등축제 같은 이름들이 쏟아집니다. 송정역을 ‘빛고을역’으로 바꾸자는 시민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너른골을 사용하면, 차츰 익숙해질 것입니다. 이미 ‘너른골묵밥’이라는 맛집이 있고, ‘너른골미술제’도 열리고 있으며 너른골환경생태연구소, 너른고을사랑모임, 너른포럼 등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장단음을 구분하는 1안보다는 순우리말 이름을 되살려 사용하는 편이 한결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끝으로 욕심이 지나치다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광주광역시라는 행정 명을 '빛고을광역시'로 바꾸고, 경기도 광주시는 '너른골시'로 하면 어떨까요? 너무 파격적이다, 어렵다, 안 된다고 답할 분들이 있겠지만, 정말로 안 되는 걸까요? 하면 되는 거지. 안 될 건 또 뭐가 있습니까? 문득 고 정주영 회장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회장님, 이건 좀 어렵습니다. 안 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어렵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이유를 생각할 시간에 된다,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를 생각해 오세요.


2020.3.9.



'한글 대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장님, 사모님, 어머니, 아주머니, 아가씨...  (0) 2020.03.22
TICKETS???  (0) 2020.03.18
'틀리다'에 대한 오해  (0) 2020.03.08
팃포탯과 맞대응전략  (0) 2020.03.08
라스트마일딜리버리  (0) 2020.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