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번이 실수했지만, 곰곰이 따지고, 깨끗이 청소하고, 꼼꼼히 챙기고, 대비를 철저히 하고, 정신무장 단단히 하고, 느긋이 접근하면 깊숙이 파고들 수 있다.
무슨 내용인지는 따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이’와 ‘히’가 붙는 말들을 나열해 본 것입니다. 우리말에는 이처럼 ‘이’나 ‘히’가 붙는 부사어가 많습니다. 문제는 이 말들을 쓸 때마다 고민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를 붙여야 할까, ‘히’를 붙여야 할까?
부사화 접미사 ‘이’와 ‘히’를 쉽게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하다’를 붙여 보는 것이다. ‘하다’를 붙일 수 있으면 ‘히’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이’가 된다. ‘꼼꼼하다’는 말이 되고 ‘곰곰하다’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꼼꼼히’ ‘곰곰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말끔히’ ‘쓸쓸히’ ‘조용히’에는 ‘히’가 붙고 ‘간간이’ ‘번번이’‘헛되이’에는 ‘이’가 붙는다.
- 한국일보 우리말 톺아보기 ‘이’와 ‘히’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506281177773426
한국방송공사 임수민 아나운서가 5년 전에 쓴 글을 보면서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이’냐 ‘히’냐? 1번 설명은 어간에 ‘하다’가 붙는 말에는 ‘히’를 붙이라는 겁니다. 이런 낱말에는 ‘꼼꼼하다-꼼꼼히, 급하다-급히, 꾸준하다-꾸준히, 도저하다-도저히, 딱하다-딱히’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다’가 붙는 경우에도 ‘히’가 아니고 ‘이’가 붙는 말들이 있습니다.
‘깨끗하다’이니까 ‘깨끗히’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근이 ‘ㅅ’으로 끝나는 말들은 ‘이’가 붙는다. ‘깨끗이’ ‘번듯이’ ‘느긋이’ 등과 같다... 그러나 어근이 ‘ㄱ’으로 끝날 때에는 ‘이’가 붙는 경우도 많다. ‘깊숙이’ ‘끔찍이’라고 쓰고 ‘깁쑤기’ ‘끔찌기’라고 발음해야 옳다. ‘수북이’ ‘촉촉이’도 마찬가지다.
2번 설명입니다. ‘깨끗’에 ‘하다’를 붙일 수 있지만 어간이 ㅅ으로 끝날 때는 ‘히’가 아니고 ‘깨끗이, 번듯이, 느긋이, 오롯이, 산뜻이, 생긋이’ 등처럼 ‘이’가 붙습니다. 3번 설명은 어근이 받침 ㄱ으로 끝나면 깊숙이, 끔찍이, 수북이, 촉촉이, 더욱이, 오뚝이, 일찍이, 해죽이 등처럼 ‘이’가 붙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복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엄격히’에는 ‘히’가 붙는다.
4번 설명은 ‘솔직’이나 ‘엄격, 딱’의 경우처럼 어근이 ㄱ으로 끝나도 ‘이’가 아닌 ‘히’가 붙어 솔직히, 엄격히, 딱히, 묵묵히 등으로 쓴다는 겁니다. 뭔가 규칙이 있는 듯하면서도 계속 예외가 따라붙어 굉장히 헷갈립니다. ‘굉장히’는 ‘굉장’에 ‘하다’가 오므로 ‘굉장히’로 씁니다. 그럼, 다시 한 번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① ‘하다’가 붙으면 ‘히’가 붙는다. (꼼꼼히, 쓸쓸히 등)
② ‘하다’가 붙더라도 어근이 ㅅ으로 끝나면 ‘이’가 붙는다. (깨끗이, 번듯이 등)
③ ‘하다’가 붙더라도 어근이 ㄱ으로 끝나면 ‘이’가 붙는 경우가 많다. (깊숙이, 끔찍이 등)
④ 어근이 ㄱ으로 끝나더라도 ‘히’가 붙는 낱말이 있다. (솔직히, 엄격히 등)
이쯤 되면 도대체 ‘이’를 쓰는지 ‘히’를 쓰는지 다시 묻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어가 어렵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할 겁니다. 어렵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을 왜 집‘이라고 하고 ’하늘‘을 왜 ’하늘‘이라고 하게 됐는지 누구도 알 수 없듯이 논리적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게 언어가 지닌 속성입니다.
한국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체계적인 문법과 언어규범을 지닌 어떤 언어라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많습니다. 영어에서는 전치사 in, on, to, for, of, with 등을 상황에 맞게 씁니다. with를 써야 할 것 같은데 to나 on을 쓰기도 하고 셋 다 가능하기도 합니다. 꼼꼼히 들여다봐도 난해합니다. 부정관사 a, an과 정관사 the의 용법을 정확히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을까요? knock, Autumn, empty, calm, christmas, bomb 등에서 빨간 색 글자들은 묵음입니다. 왜 발음도 하지 않는 글자를 쓰는 걸까요?
일본어에서 ‘橋(하시)’는 우리말 ‘다리’에 해당합니다. ‘大橋(오오하시)’라고 하면 ‘큰 다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같은 ‘하시’를 쓰면서 ‘바시’라고 읽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나의 다리’라는 이름을 가진 ‘一ツ橋大学(히토츠바시대학)’이 그렇습니다. ‘하시’가 아니고 ‘바시’라 읽는데, 음을 편하게 발음하기 위한 ‘음편현상’이라고 하지만,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히토츠하시’라고 얼마든지 발음할 수 있지 않나요?
언어는 유래를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없는 것이 더 많고, 규칙적이기도 하지만 규칙적이지 않기도 합니다. 문법에 맞춰 사용하지만, 문법에 어긋나도 관용적으로 쓰는 것도 많습니다. 좋거나 나쁘거나를 떠나 습관에 따라 그렇게 된 경우도 많습니다. 대부분의 언어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를 지향합니다만,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임수민 아나운서는 ‘이’와 ‘히’에 대해 이렇게 조언합니다.
애석하게도 ‘이’와 ‘히’의 구분에 있어 규칙이 모든 단어에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번거롭더라도 일일이 살펴볼 수밖에.
‘애석하다, 규칙이 항상 적용되지 않으니, 번거롭더라도 일일이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와 ‘히’의 구분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투덜거릴 일만은 아닙니다. ‘깊숙이’인지 ‘깊숙히’인지는 임 아나운서가 강조했듯이 ‘깁쑤기’라고 발음함으로써 ‘깊숙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고, 바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발음 습관만으로 가릴 수 있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이’와 ‘’히‘에 대해 더 많은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한글맞춤법 제4장 제3절 제25항과 제6장 제51항도 읽어보고 그래도 헷갈리면 일일이 사전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외국어사전 뒤적거리는 시간의 1/10만 투자해도 우리말 달인이 될지 모릅니다.
2020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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