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희망

[시론] 간판만 바뀐 ‘동주민센터’

봄뫼 2008. 4. 30. 02:39

  50년 넘게 친숙하게 사용하던 동사무소 이름을 팽개치고 동주민센터란 간판을 달기 시작한 게 반 년이 넘었다. 보름 전쯤 종로구에서 동사무소란 간판이 하나 걸려 있는 것을 보았지만 대부분 새 간판으로 교체됐다. 길거리에 카센터나 스포츠센터, 심부름센터, 회센터와 같은 간판들이 걸릴 때 벌써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설마 하고 방심하다가 공공기관 이름마저 ‘센터’로 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야 말았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동사무소가 이름이 바뀌었어, 언제?” 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말씀을 듣고 나면 또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노발대발하신다. 지난해 12월 한글문화연대가 조사를 했을 때, ‘동주민센터’는 정부기관 이름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니 좋은 우리말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고 응답한 이들의 비율이 58.7%를 차지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의 의사를 묵살하고 사업을 강행했다. 동사무소가 더는 옛날처럼 증명서나 발급하는 곳이 아니라 주민의 복지를 위해 일하는 곳으로 거듭나기 위해 이름을 바꾼다면서 내세운 그 근본 취지를 스스로 짓밟은 것이다.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 면담을 신청하고 어렵게 만난 담당 국장에게서 들은 말은“이런 문제는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앞으로 잘하겠으니 일을 확대하지 말고 이 정도에서 조용히 덮어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꼼수에 속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어서 한글문화연대는 지금도 매주 토요일 대학로에서 동주민센터 이름 반대 100만인 서명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장관 면담을 신청했고, 정부청사 앞 1인 시위와 삭발 시위, 감사청구 등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까지 일어날 줄 누가 알았으랴! 시·도교육청 산하 전국의 시·군·구 지역교육청 이름을 ‘교육지원센터’로 바꾸고 감사·지도 기능 중심에서 지원과 컨설팅 기능 중심으로 전환한다고 한다. 교육도 행정 서비스이니 주민들이 원하는 밀착행정을 펼치겠다는 교육과학기술부 관계자의 말은 백번 옳다. 그동안의 과오를 반성하고 교육 발전을 위해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이나 수준별 수업지도 방안 안내, 학생상담이나 장학 지원 등 실질적인 지원 업무를 하겠다니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신성한 ‘교육’ 뒤에까지 ‘센터’를 갖다 붙일 이유가 있을까? ‘교육지원청’이나 ‘교육지원처’, ‘교육지원원’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뭐든 창의적으로 하자고 입이 아프게 떠들면서 궁리해 낸 게 고작 ‘센터’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말은 절대 믿으면 안 된다. 과연 교과부가 ‘센터’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교육의 정체성을 곧추세우고 백년대계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엄중하게 묻고 싶다.

 

  정부는 5월 중 당정협의를 통해 지역교육청 개편에 대한 논의를 한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습적으로 시행된 ‘동주민센터’와 달리 논의할 시간이 조금은 있다는 점이다. 지난 총선에서 뉴타운 공약으로 당선된 선량들이 많다고 세상이 시끄럽다. 한데 삼척동자도 알다시피 이미 헛공약이 된 뉴타운에 더는 할 일도 없으실 테니 이 문제라도 잘 검토해서 행정부 견제라는 의회 본연의 모습을 시원하게 보여주기 바란다. 민심을 혼란케 하면서 받아간 그놈의 표값을 조금이라도 해달란 말이다.

 

  그런데 국회의원은 일 못하면 다음 선거에서 표를 안 주면 되지만 공무원들 일 멋대로 하는 건 어떻게 막나? 영어 좋아하는 공무원들 미국 보내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좌우지간 이번에도 또 어영부영 넘어가면 행정안전부는 ‘행정안전센터’ 되고 교육과학기술부는 ‘교육과학기술센터’ 되고 머지않아 나라 이름마저 ‘대한민센터’가 될지 모른다.

 

정재환 방송인·한글문화연대 부대표

세계일보 2008.04.29 (화) 19:42, 최종수정 2008.04.29 (화)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