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중학교 다닐 때쯤 시민회관에 불이 나서 한바탕 소란이 났었던 일을. 그날 시민회관이 타버리고 난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어딘가 서울 변두리로 갈 수도 있었던 것을, 도심 한복판에 엄청난 큰 규모의 문화시설을 시설을 짓자고 우긴 건 박정희 측근의 아이디어라는 얘길 들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세종’으로 결정되었다.
불타버린 시민회관의 원래 이름은 우남회관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회관이란 이름으로 건설되고 있었던 건데,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고 그 후에 개관하게 되면서 ‘우남’이란 이름을 버렸다. 하마터면 독재자 이승만을 위한 우남회관이 될 뻔했던 시민회관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니까 ‘우남’에서 ‘시민’으로 그리고 ‘세종’이란 거룩한 이름을 갖기까지 서울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의 이름은 그런 사연을 안고 있었다.
최근 서울시에서 시청본관을 ‘시빅센터’로 만든다고 한다. 행정 기능은 대부분 서소문으로 옮기고 도서관, 서울홍보관 등을 만들어 서울시민을 위한 문화시설로 활용한단다. 언젠가 서울시청 앞 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주었듯이 시청건물까지 시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발상이야 환영하지만 하필이면 이름이 ‘시빅센터’다.
하긴 요즘 세태가 옛날 이름이든 새로운 이름이든 빵집이든 기업이든 간에 온통 부스러기 영어 갖다 붙이는 게 추세고 유행이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죽하면 제2의 창씨개명이라는 말까지 나올까? ‘시빅센터’라고 해 봐야 특별한 것도 아니고 ‘시민회관’인데, 그렇다면 그냥 시민회관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시빅센터’로 할 필요는 없다. 시민회관이 평범해서 뭔가 창의적인 것을 원하는 거라면 시빅센터가 아닌 다른 것이어야 한다.
우리말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세종에게 진 빚을 갚고 세종의 정신을 이을 생각이 있다면 알쏭달쏭한 영어 이름을 마구 남발해서는 안 된다. 무분별한 부스러기 영어 남용은 우리의 정체성을 흐리고 시민들에게 불편을 준다. 어쩌다 보면 한글을 사랑하다든가 우리말을 사랑한다든가 하는 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할 때가 있던데 그런 씨알머리 없는 얘기는 하지도 말고, 말 다르고 하는 짓 다른 그런 위선도 부리지 말자.
만일 서울시가 시빅센터를 고집한다면 머지않아 전국에 있는 부산시민회관이라든지 대구시민회관이라든지 하는 이름들도 몽땅 시빅센터로 바뀔지 모른다. 알량한 ‘하이서울’이 전국을 다이내믹하고 패스트하고 컬러풀하고 어메니티한 곳으로 오염시킨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아직 이름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 시민공모 같은 것을 통해 좀 더 우리다운 이름을 지어야 한다. 우리말글 사랑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시빅센터를 버리고 우리말 이름을 찾는 게 바로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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