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의 자동차가 서로에게 돌진한다. 누군가가 운전대를 돌려 피하지 않으면 자동차는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고, 양쪽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피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먼저 피하는 사람은 겁쟁이가 되어 결국 게임에서 지게 된다. 저쪽에서는 겁쟁이를 닭(chicken)에 비유하기 때문에 치킨 레이스 혹은 치킨 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현실에서 본 적은 없다. 왕년에 좀 놀았다는 친구들한테도 그런 짓거리를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물론 글쓴이 주위에 진짜 논 애들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하간 치킨 레이스라는 건 그만큼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런데 경제계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벌어진 치킨 게임으로 D램을 주력으로 삼던 엘피다가 파산, 마이크론에 흡수 합병된 가운데 낸드플래시서도 치킨 게임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도시바가 낸드플래시 생산량을 30퍼센트 감축할 계획이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기사 내용이다. 워낙 경제에 문외한이라 뭔 소린가 했는데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서도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들이 주도한 치킨 게임에서 승리했다”는 아랫줄을 읽어 보니 대충은 알 것 같다. 낸드플래시 시장을 놓고 우리나라 기업하고 일본 기업이 죽기 살기로 경쟁한 끝에 우리나라 기업이 이겼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일본 기업보다 우리나라 기업이 더 깡이 세다는 거다.
2년 전에 도쿄에 가서 한 달을 지낸 적이 있다. 재일동포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2세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뭐 그런 걸 좀 조사하러 갔었다. ‘시로카네’라고 도심 한복판에 있는 조그만 호텔에 방을 얻어 지냈는데, 주위에 작은 식당, 빵 가게, 과일 가게 등이 있었다.
식당이야 조금 늦게까지 하는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빵 가게하고 과일 가게는 저녁 7시나 7시 반이면 문을 닫았다. 아침에 가서 빵을 사지 않으면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빵을 사기가 어려웠다. 과일 가게도 문 닫는 시간이 비슷해 보였다. 문득 ‘저러고 먹고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먹고살 수 있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그런데 서울에서 가끔 밤늦게 귀가하다가 집 근처 빵집에 들를 때가 있다. 밤 12시가 됐는데도 문을 열고 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진열대가 많이 비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별문제 없다. 빵집 골목 앞에 있는 치킨집도 좀처럼 문을 닫을 것 같지 않다. 하긴 치킨집이야 늦게까지 술 마시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밤늦게 찾아오는 단 한 명의 손님을 위해 심야영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빵집은 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치킨 게임도 아닌데 밤 12시를 넘겨 새벽 한두 시까지 문을 열어야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이 안쓰러워 보인다.
시로카네에 사는 사람들처럼 좀 일찍 가서 빵을 사면 되지 않을까? 오후 7시 반이 너무 이르다면 한 9시쯤만 돼도 좋지 않을까? 처음에는 좀 불편하겠지만 익숙해지면 빵집 아저씨도 일찍 문 닫고 좀 쉬고, 애들하고 좀 놀기도 하고, 잠도 좀 자고, 뭐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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