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를 후원한 사람들] 의령의 독립운동가 남저 이우식 ①
1914년 여름, 주시경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말모이 작업은 중단되었다. 1915년 최남선은 광문회에 계명구락부를 결성하여 조선어사전 편찬을 재개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쫓긴 김두봉은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0년 이규영마저 세상을 떠났다. 주시경이 시작한 말모이 편찬은 성난 바람과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돛단배마냥 막막한 바다 위를 표류했다.
물론 조선인들의 사전 만들기가 완전히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1927년 문일평, 오세창, 윤치호, 이능화, 최남선 등이 주도했던 계명구락부가 광문회의 사전 원고를 인수하여 최남선의 책임 아래 작업을 진행했다. 계명구락부의 사전 편찬에 거는 사회의 기대가 컸지만, 양건식, 변영로, 정인보, 최남선 등이 실무에서 물러나고, 1929년 이윤재, 이용기, 한징마저 하차하여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선인들의 절박함은 주시경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던 조선어연구회에 의해 다시금 시동이 걸렸다.
1929년 4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극로가 조선어연구회에 들어왔다. 이극로는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경제학 박사가 왜 조선어연구회의 회원이 되었을까?
이극로 선생 |
1912년 마산의 창신학교를 마친 이극로는 서간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평북 창성에서 아침밥을 먹을 때 일행 중 한 명이 고추장을 달라고 했는데 집주인이 고추장이란 말을 못 알아들었다. ‘고추장’이란 이름을 몰랐다. 어찌 같은 조선 사람이 고추장을 모른단 말인가? 고추장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창성지방에서는 고추장을 ‘댕가지장’이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극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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