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환의 역사기행

최재형 활동지 포시에트항

봄뫼 2019. 7. 21. 01:19


 1863년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에 정착했고, 1869년 함경도에 큰 홍수로 사람들이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하고, 부패한 관리들의 폭정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많은 한인들이 두만강을 건넜다.


  러시아는 이주해 오는 한인들의 노동력을 활용했다. 한인들은 부두노동자, 짐꾼, 러시아군대의 막사나 도로 건설 현장 등에서 육체노동에 종사하면서 지신허, 포시에트, 연추, 크라스키노 등 한인 마을을 건설했고, 차츰 라즈돌리노예,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등지로 퍼져 나갔다.


  포시에트는 최재형의 젊은 날 활동지이다. 최재형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노비 최흥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가족과 함께 지신허로 이주했고, 형수와 사이가 좋지 않아 11살에 가출했다. 포시에트항에서 상선의 어린 노동자로 일하다가 러시아인 선장 부부의 사랑을 받았다.


  최재형은 6년 동안의 선원 생활을 통해 그는 러시아어와 러시아인들의 생활방식을 익혔을 뿐 아니라 견문도 넓혀 러시아에 정통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1891년, 최재형은 얀치혜 학교에 정교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는 아이들에게 러시아식 교육을 하기 위해서였다. 최재형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2,000 루블을 후원했다. 1890년대 말 연해주 지역 32개 한인마을에 러시아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1888년 조로육로통상장정이 체결되자, 한인들의 러시아 입적이 허락되었다. 실제로 입적이 시작된 것은 1895년이었고, 한인 1,500가구 정도가 입적했다. 최재형은 일찍이 러시아로 들어왔으므로 귀화가 허락되었고, 군인과 공무원에 등용될 수 있는 특전과 토지를 무상분배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1895년 최재형은 통역직을 사직하고 처음으로 러시아가 인허한 최초의 한인자치기구 얀치혜 남도소의 도헌에 임명되어 그 후 13년 동안 도헌으로 일하면서 러시아에 신뢰받는 한인이자 자산가로 성장했다.


  1908년 4월 최재형은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였고, 동의의병은 1908년 7, 8월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했다.
  안중근, 엄인섭, 이범윤 등의 국내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시적으로 의병 활동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배경에는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한 러시아의 압력이 있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이 이토 처단을 위해 하얼빈으로 출발할 때는 대동공보사를 배경으로 지원했다. 최재형의 딸 증언에 따르면, 안중근은 출발 전 최재형의 집에 머물며 사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안중근이 거사에 성공하자, 그를 지원하기 위해 한인 변호사와 러시아인 변호사를 여순으로 급파하고, 안중근의 가족을 돌봤다.


  1910년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민족언론인 대동공보와 대양보의 사장, 1911년 권업회 총재, 1918년 전로한족총회 명예회장,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국민의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0zJzo2dTkf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