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다’와 ‘벌리다’ 못지않게 헷갈리는 게 '늘이다'와 '늘리다'입니다. 바지 기장은 늘이는 걸가요, 아니면 늘리는 걸까요? 요즘 경제가 어려운데 투자를 늘려야 할까요, 아니면 늘여야 할까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을 늘려야 할까요, 늘여야 할까요?
늘-이다
「1」 본디보다 더 길어지게 하다.
예) 고무줄을 늘이다. / 바짓단을 늘이다. / 엿가락을 늘이다.
「2」 ((주로 ‘선’과 관련된 말을 목적어로 하여)) 선 따위를 연장하여 계속 긋다.
- 표준국어대사전
'늘이다'는 예문에 제시된 고무줄, 바짓단, 엿가락처럼 길이가 있는 어떤 물체를 더 길게 만들 때 사용하면 됩니다. 반면 ‘늘리다’는 아주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1」 물체의 넓이, 부피 따위를 본디보다 커지게 하다.
「2」 수나 분량 따위를 본디보다 많아지게 하거나 무게를 더 나가게 하다.
「3」 힘이나 기운, 세력 따위를 이전보다 큰 상태로 만들다.
「4」 재주나 능력 따위를 나아지게 하다.
「5」 살림을 넉넉하게 하다.
「6」 시간이나 기간을 길게 하다.
- 표준국어대사전
사전에 오른 풀이만 6가지입니다. 얼핏 ‘늘이다’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만, '우리는 넓은 평수로 늘려 이사했다.', '학생 수를 늘리다.', '실력을 늘려서 다음에 다시 도전해 보아라.', '살림을 늘리다.', '시험 시간을 30분 늘리다.' 같은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고민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고민하면 없던 고민거리가 생기는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늘이다’와 ‘늘리다’를 구별하는 요령이 하나 있습니다. ‘늘이다’와 ‘늘리다’가 헷갈릴 때, ‘이’ 자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길이’와 ‘늘이다’에는 공통적으로 ‘이’가 들어 있습니다. 길이는 늘이고!
치마가 너무 짧으면 학생답지 않아 보이니까, 무릎 아래까지 기장을 늘이는 게 좋겠어요.
이 탁자는 한쪽에 6명이 앉을 수 있도록 50센티 정도 늘여(늘이다) 주세요.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늘이다’에 다른 의미가 있는데, 이것을 마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아래로 길게 처지게 하다.
예) 주렴을 늘이다./ 김 씨는 벌써부터 점방에 국수를 발처럼 늘여 널고 있다가….≪최명희, 혼불≫
위의 ‘늘이다’는 앞에서 확인한 ‘늘리다’나 ‘늘이다’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예문에 나온 것처럼 어떤 물건을 늘여 놓을 때 쓰는 말입니다. ‘커튼을 길게 늘어트려 놓았다.’라든가 ‘발을 길게 늘이다.’처럼 표현할 때 씁니다. 문제는 2번 설명입니다.
「2」 넓게 벌여 놓다.
예) 경계망을 늘이다.
이때 사용하는 ‘늘이다’는 ‘경계망을 늘리다’로 혼동해서 쓸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나기도 합니다. 여하간 ‘넓게 벌여 놓다’라고 할 때는 ‘늘이다’를 써야 하는데요, 다른 예문들이 있습니다.
경계 범위(=경계망)를 늘였다.
수사망(=수사 범위)를 늘였다.
업무 범위를 늘이다.
그러니까 ‘시험 시간은 늘리고, 시험 범위는 늘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참, 헷갈리지요? ‘도대체 어떻게 구분하라는 거지?’ 절로 볼멘소리가 나올 법합니다. 솔직히 이때 쓰는 ‘늘이다’ 대신 그냥 ‘늘리다’를 적용해 써도 될 것 같고, 그러면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그렇다고 해서 엿장수 맘대로 말을 바꿀 수도 없고, 사전의 설명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이런 복잡한 문제가 생겼을까요? 한국인들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써왔고 지금도 그렇게 쓰고 있는 겁니다. 사전을 변론하려는 게 아니고, 그래서 사전도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쨌거나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어 보입니다. 구분이 잘 안 될 때는 번거롭더라도 사전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길이’와 ‘범위’는 ‘늘이다’를 쓴다고 기억하고, 나머지는 대개 ‘늘리다’를 쓴다고 기억하면 어느 정도는 해결될 것 같습니다.
기장은 늘이고, 수사망도 늘이고, 시험 범위도 늘이고,
회사 직원은 늘리고, 연수 기간도 늘리고, 신제품 투자비용도 늘리고!
2020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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