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톱

'너무'를 너무 사랑한 대한민국

봄뫼 2018. 10. 21. 12:45

- [정재환의 한국어 팩트체크] 수시로 변하는 표준말, 일관성은 있나

국어에 관한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전화가 있다. 바로 국립국어원의 ‘가나다전화’다. 전화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 질문을 할 수 있는 ‘온라인가나다’를 비롯해서 온갖 누리소통망을 이용할 수 있다. 다음은 지난 2015년 5월 29일자 상담 내용이다.

질문: 부사 ‘너무’가 제가 알기로는 부정의 말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최근 일부 티브이 방송의 자막이나 사람들이 이 말을 쓰는 것을 보면 긍정의 뜻에도 쓰더라고요. 또 사람들이 너무를 긍정의 뜻으로 너무 많이 사용해서 이제는 긍정의 뜻으로도 쓸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사전을 찾아보면 너무가 부정의 뜻으로밖에 보이지 않던데, 어떤가요? 긍정의 뜻으로도 너무를 써도 되는 건가요?

 

‘너무’의 사용에 대한 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 같은 질문이 올라온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어떤 식의 답변이 나왔을지 궁금하다.

 

답변: ‘너무’는 “너무 크다/너무 늦다/너무 먹다/너무 어렵다/너무 위험하다/너무 조용하다”와 같이,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을 나타내고, 그 뜻이 말해 주는 대로, ‘너무’는 용언을 부정적으로 한정하는 부사로 쓰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너무’의 뜻과 쓰임새를 고려하여, 용언을 긍정적으로 한정하는 맥락에서는 ‘너무’가 아닌, ‘참, 정말, 아주, 매우’ 등을 써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참, 정말, 아주, 매우 적절한 답변이었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너무’를 너무 사랑한 대한민국이 다 알고 있듯이 불과 한 달 후인 6월 22일 ‘너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2015년 2분기(2105.6.22.) 표준국어대사전 정보 수정. 왼쪽은 수정 전, 오른쪽은 수정 후.

 

밑줄 친 부분을 보면 바뀐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수정 전’의 뜻풀이에는 ‘너무’가 부정적인 의미의 문장에만 사용되었지만, ‘수정 후’에는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 ‘너무 반갑다’ 등이 올라 있다. ‘너무’를 너무 사랑한 대한민국 국민들 탓에 이런 일이 발생했지만, 국립국어원의 생각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인 ‘애민’과 ‘편민’(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되새기며 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국어를 쉽고 편하게 쓸 수 있도록 하고 국민들에게 정제된 언어 정보를 제공함은 물론 장애인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언어 복지 혜택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 송철의 국립국어원장, ‘쉽고 편한 우리말’ 가꾸기 계획 발표(2015. 7. 9).

실제 ‘너무’를 너무 사랑한 많은 이들이 쌍수를 들어 만세삼창을 불렀다. ‘너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불편한 비판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국민이 만족했다고 해서 이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환영 쪽은 ‘너무 좋았겠지만’, 어렵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올바른 국어사용을 고수해 온 이들은 몹시 허탈했을 것이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 특히 ‘너무’를 긍정적인 의미의 문장에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온 국어 선생님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여전히 효력을 잃지 않았는지, 어느 덧 3년이 지나니, 더 이상은 ‘너무’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이 글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은 짓거리나 사후약방문쯤으로 느낄 독자들이 아주 많거나 매우 많거나 몹시 많거나 참으로 많거나 정말로 많을 것이다.

반면에 ‘너무’만큼이나 사랑하는 ‘애기’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아기’를 사랑하는 한국인들보다 ‘애기’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훨씬 많은데도 왜 ‘애기’는 표준말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계속 차별받아야 하는 것일까? ‘애기’ 역시 표준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니 이 점 오해 없기 바란다.

http://m.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1&fbclid=IwAR2mgl1aKHoiijbkLyywKCIdKcHw6j3CSB6arKHpmsHioVaIdq9mtQU16J8